작업노트: 셀버의 일기_ 우리가 놓치고 있는 증거 (기후위기 전시)
아이의 그림일기를 우리가 본다면, 아이의 시선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그것이 미래에서 온 증거로 제시된다면, 또한 그 아이가 인간이 아닌 ‘사념’이라면 이 이야기는 단지 상상이 아니라 누락된 현실의 또 다른 언어가 된다고 생각한다.
‘셀버의 일기’는 2085년, 기후재앙 이후의 시대에 존재하는 사념체 셀버가 보내온 감정의 파편이다. 그는 2077년에 태어난 8살의 존재이며 세상에 남겨진 감정과 기억의 조각으로 구성된 존재다.
이 사념은 과거, 즉 우리의 현재에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다. 그것은 명확한 데이터도, 경고의 음성도 아닌, 아주 단순한 그림일기로 말이다.
1. 팩스
우리는 왜 굳이 오래된 아날로그 통신수단인 팩스를 통해 이 메시지를 받기로 설정했을까?
디지털 신호와 화려한 인터페이스보다 더 깊게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아날로그가 남기는 잔상이다. 전파로 도달한 사념의 흔적은 정제된 이미지가 아니라 번지고, 삐뚤고, 복사된 감정이다.
팩스는 바로 그런 이미지의 문지방이다.
우리는 그것을 출력하고 받아들여 그 잔열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다.
2. 아이의 시선
기후위기를 설득하기 위해 성인이 등장하는 방식은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지금 내가 직접 당할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서 셀버를 8살로 설정하였다.
어린아이가 전하는 감정은 설명이 아니라 체감이다. 정서적으로 가장 깊숙이 도달할 수 있는 방식은 때때로 가장 단순한 그림 한 장이기도 하다.
셀버는 우리가 요구하지도 요청하지도 않았던 증거를 자발적으로 보내왔다.
그림일기는 안네 프랑크의 일기처럼 개인의 기록이자 시대의 증언이 된다. 셀버는 자기가 본 것, 자기가 느낀 것, 그 모두를 그림으로 남긴다. 그리고 그 그림은 관객의 눈에 닿는 순간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 된다.
이 시점이 바로 '예술'이 개입하는 지점이다.
전시 공간에서 셀버의 그림일기는 매 30분마다 1장씩 그림일기를 보낸다.
총 500여 장의 다른 내용이 전시기간 중에 전송되고 출력된다.
그렇게 관객은 ‘매일 다른 기억’을 목격하게 된다. 전시는 반복되지 않는다. 단지 축적될 뿐이다.
3. 그림은 흑백이다
기술적으로 ‘전파 수신 당시 컬러 정보는 함께 수신되지 않았다’는 설정이지만 감정적으로는 ‘색이 사라진 시대’에 대한 은유다. 상상력은 색을 복원하려고 노력하지만 셀버가 본 세상은 이미 빛을 잃은 것이다.
4. 픽션을 기반으로 한 작품 (컨셉추얼 아트)
픽션은 거짓이 아니다. 때로 가장 정직한 진실은 상상의 틈에서 현실보다 더 생생하게 표현되기도 한다.
조지 오웰의 <1984>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전체주의 감시사회에 대한 상상에서 출발했지만 오늘날 디지털 감시와 언어 통제, 프라이버시 침해 등 현실의 단면을 예리하게 예고한 작품이다. 허구로 쓰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문제의식은 현실보다 앞서 있었고, 오히려 그 허구가 현실의 본질을 꿰뚫는 진실로 기능했다.
5. 이 작업의 질문
우리는 그림일기를 증거로 받아들이는가?
우리에게 증거가 있어야만 행동할 수 있는가?
기후변화에 대한 정보는 이미 넘쳐난다. 하지만 문제는 정보가 아니라 행동과 실천 공감이다.
나는 이 작업을 통해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기후위기를 낯설 지만 따뜻한고 간절한 픽션의 방식으로 다시 말해보려 했다.
우리의 목표는 그 감정 하나가 미래를 아주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