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대신 낳는 기계
얼마 전 중국에서 사람을 대신 낳아 주는 기계를 1년 안에 상용화하겠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몇 해 전 내가 했던 수업에 한 학생의 가상연구 보고서였다.
나는 미대를 소속 교수지만 지난 5년 동안 공대와 의공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감형 기술론’이라는 강의를 해왔다. 미대 교수가 공대 강단에 서는 것은 다소 낯선 일이다. 그러나 나는 기술의 발전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체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언제나 인간이 느끼는 경험과 감각을 다루어 왔고, 공대생들에게도 기술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교감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다.
그 수업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기말 과제로 미래 기술 시나리오를 구상하게 했다. 우리가 지금 배운 기술들이 극도로 발전했을 때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은 무엇이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연구는 무엇인가? 를 묻는 과제였다. 그 중 한 학생의 발표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는 “체감형 기술의 끝은 인간의 몸을 대신하는 것이다”라는 정의로 발표를 시작했고 주제는 ‘사람을 낳는 기계’였다.
그때 나는 섬뜩함을 먼저 느꼈다. 출산을 기계가 대신한다는 발상은 충격이었고, 동시에 그런 상상을 학생이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인간의 출산은 오랫동안 신의 뜻으로 여겨져 왔다. 지금은 인공수정이 보편화되었지만 여전히 태아와 어머니가 교감하는 과정, 태교와 감각적 소통은 인간적이고 깊은 의미를 지닌다. 만약 기술이 이 과정을 완전히 대체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까?. 인간적인 교감과 감정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계가 아니라,인간다움이 축소되는 사건일 것이다.
나는 기술이 너무 빠르다고 늘 생각했지만 사실은 내가 상상하지 못하는 속도로 이미 앞서 가고 있었다. 학생의 발표를 들은 지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인데, 현실에서 상용화를 말하는 단계다. 상상은 현실을 앞지르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현실이 상상을 추월한다. 문제는 우리가 이 변화의 속도에 논의조차 준비하지 못한 채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규정하는 세계관이라고 말했다. 기술은 인간을 대상으로 만들고, 때로는 인간 자체를 자원으로 바라보게 한다. ‘사람을 낳는 기계’라는 상상은 그래서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정의를 다시 묻는 문제다. 기술이 가능성을 보여줄 때 예술과 철학은 그 가능성을 정말 원해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만약 지금 그 학생을 다시 만난다면 “네가 상상한 것이 현실이 되었다. 이제는 그 기술의 의미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의 이름으로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무엇인지. 인간적인 교감과 감정이라는 아름다움을 어리석게 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을 대신 낳는 기계보다 더 두려운 것은 우리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미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