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Ⅳ. 삶·일상

by 이들멘

24절기 중 16번째인 추분. 춘분과 함께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이지만 밤이 길어지는 시작점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0도를 넘으며 맹위를 떨쳤던 더위가 갑자기 꼬리를 감췄다. 태풍의 영향으로 폭우가 쏟아지더니 기온은 곤두박질쳐서 잘 때는 이불을 찾게 되었다. 길어지는 밤을 견딜 수 있게 날씨도 알아서 조절하는 모양이다.


일전 지인이 『죽음』이란 책을 읽어볼 만하다고 소개해줬다. 저자는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라는 긴 이름의 프랑스 철학자이다.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책의 앞부분만 읽어봐도 내공이 상당한 수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책의 부제는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이다. 절묘했다. 누구든 ‘죽는다’라는 걸 알고 있으니 ‘이토록 가깝고’, 그러함에도 <죽음>이 당장은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여기니 ‘이토록 먼’ 것인가?


‘죽음’을 내 문제로 실감하려는 저자의 작업은 급진성과 뜨거움, 반어와 역설의 자유로움으로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죽음과 죽음에 관한 생각은 다르다. 저자는 그걸 ‘삼인칭, 이인칭, 일인칭의 죽음’으로 구분했다. 삼인칭과 이인칭은 타인에 대한 나의 관점이거나 나에 대한 타인의 관점이다. 일인칭은 나에 대한 나의 관점, 너에 대한 너의 관점을 말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각자 자신에 대한 관점이다.

‘삼인칭’의 죽음은 죽음을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판단한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죽음의 얼굴 없는 익명의 주어, 제비뽑기로 죽음이 지명된 불운의 당사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인칭’은 삼인칭의 익명성과 일인칭의 비극적 주체성 사이에 중간적이고 특권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멀고 무관한 타인의 죽음과 바로 그대로 나의 존재인 자기의 죽음 사이에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는 근접성이 있다. ‘너’는 사실 첫 번째 ‘남’, 중간에 아무도 없는 남이자 나와 접해 있는 나 아닌 것, 타자성의 최근접 한계를 나타낸다. 죽음이란 삼인칭의 관점에서는 상대적인 현상이라면, 일인칭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예외적이고 절대적인 사건이다.

일인칭에서는 미래야말로 특권이다. 나는 실제로 그리고 정의 자체에 의해 언제나 나의 죽음 ‘이전에’ 있다.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나에게는 ‘동안’은 물론, ‘이후’가 완강히 거부되어 있다. 죽음은 평생 미래형으로 있다는 의미다. 출생이 평생 과거였고 이미 일어난 일이었던 것처럼. 자기의 죽음에 대해 일인칭은 예지나 예감을 갖지만, 결코 추억은 갖지 못한다. 반면, 자신의 출생에 대한 추억이면 몰라도 결코 예감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넘치게 채우고 있는 건 생의 찬란함이다. 삶과 죽음은 별개로 분리된 게 아니다. 삶의 끝은 죽음이다.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게 두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건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다. 대부분 사람이 죽음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를 취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죽음』이란 책의 분량이 700 페이지 이상으로 두껍다. 하지만 추분을 기해 밤이 길어지고 점점 선선해지는 날씨에 접하게 된 건 행운이다. <죽음>에 대한 서양 철학자의 색다른 관점과 사유를 통해 그걸 받아들이는 또 다른 방법을 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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