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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꿈 Jul 31. 2021

5화. 움막에 머문 사람들

그해 여름 못다 한 이야기



역병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통금을 실시하고 마을 어귀 느티나무 옆에는 외지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움막도 설치하였다.


잡귀를 쫓고 역병을 물리치려는 장승제를 올리고 마을 어귀에서 통금을 실시하는 등 오랜 삶 속에서 터득한 어른들의 기지로 모래톱 마을은 인근 지역과 달리 괴소문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평온을 되찾아가는 듯했다. 수도권이나 산 너머에서 들려오는 전염병 소식은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오래전부터 대대로 모래톱 마을을 지켜온 선조들의 지혜와 슬기는 언제나 삶의 터전에 쏠려 있었다. 그런 삶의 오랜 경험과 단합된 마을 전통은 이번 역병의 창궐에서도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잡귀를 무슨 수로 막을 수 있겠는가. 어른들은 세상의 이치와 삶의 원칙 속에서 늘 답을 찾아왔듯이 무서운 역병의 엄습에도 혼란을 줄이고 흔들림 없이 마을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이런 모습은 모래톱 마을이 숱한 역경을 딛고 지금까지 존재해온 이유이기도 하였다. 윗대 선조들은 어른들에게 삶의 교훈을 일깨워줬고 청년들에게 전수했으며 그 속에서 어린아이들은 마을의 전통과 문화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해오고 있었다. 모래톱 위에서 사는 법과 삶을 살아내는 순리가 모래톱 마을 사람들 모두의 정신과 뼛속까지 배여 온 것이었다. 마을 어른들은 평소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며 한없이 너그러웠지만 때로는 단호했고 강단이 있었다. 그것이 모래톱을 지키고 자라나는 아이들을 지키며 모두의 삶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라 굳게 믿었다.


그런 마을 어귀에 읍내에서 외지인을 태운 경운기 한 대가 멈춰 섰다. 역병으로 외지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었으니 동네 기와집 댁의 경운기였지만 마을로 함부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마을에는 순식간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어귀에서 출입이 제지된 사람이 세 사람이라는 말도 들리고 두 사람이라는 소리도 들렸다. 사람들이 산 너머 연기가 났던 마을을 지나왔다느니 서울에서 역병을 피해 내려왔다느니 근거 없는 말들도 무성했다. 평온하던 모래톱 마을은 갑자기 역병의 혼란과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심각한 표정으로 의논을 하기도 하고 통금을 서던 젊은 청년들도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것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해 여름 역병이 생기고 마을을 지나치려는 나그네들은 있었지만 마을에 꼭 들어올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마을에 들어 올 목적으로 멀리서 찾아왔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소문도 그렇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그들은 기와집에서 당분간 머물기 위해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기와집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큰 벼슬을 한 토박이 어른이며 동네에서는 부잣집으로 통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공동체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을 어른들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질녘쯤에 마을 어귀에 도착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우선 강나루 상류에 있는 움막을 정리하여 그들을 그곳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역병이 퍼진 서울에서 내려왔으니 읍내에서 의원을 불러 진찰도 마쳐야 마을 출입이 가능하다는 언질도 주었다. 서울에서 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하룻밤을 불편한 움막에서 지새워야 다. 날이 밝자 청년들은 나룻배를 이용해 아침 일찍 읍내로 가서 외지인들을 진찰할 의원을 데리고 왔다. 진찰을 받을 사람은 부모와 아이 등 세 사람이었다. 부모는 40대쯤으로 보였고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외지인들이 하룻밤을 움막에서 지내고 의원의 진찰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마을 사람들이면 누구나 알게 되었다. 그들이 마을로 들어오는지에 대해 어른들은 물론이거니와 단이와 아이들도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아마도 자기들 또래의 여자아이가 보였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나라에 무서운 역병이 창궐하고 있는 시국이니 외지인의 출입은 곧 두려움을 의미하기도 했다. 역병을 막아내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모래톱 마을 어른들이 외지인들에게 행했던 여러 가지 원칙과 절차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것들을 배웠다.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익히며 성장해가고 있었으나 지역사회나 마을 공동체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배우는 것들도 많았다.


밤새 움막에 머물렀던 외지인들은 정오가 되기 전에 의원의 진찰을 끝내고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이들은 경운기를 타고 기와집으로 가고 있는 외지인들을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다가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자기들 또래로 보이는 얼굴이 하얗고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도 경운기에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단이와 친구들은 먼 곳에서 마을에 온 아이에게 유난히 눈길이 쏠리고 궁금해하며 관심도 많았다. 윤택이는

"저 아이 몇 학년쯤 되어 보이는데?"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잘 모르긴 해도 중학생은 아닌 것 같아."라고 석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 반 리솔이보다 더 예쁘고 키도 큰 것 같은데···."라고 창의도 한마디 거들었다. 단은 아무 말도 없이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소녀를 무심한 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소녀의 나이나 학년은 물론이고 언제까지 마을에 머물게 되는지 등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긴 했으나 눈에 띄는 외모였다. 무엇보다 시골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하얀 피부와 쁜 자태에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경운기가 기와집 헛간으로 들어가 시동을 끌 때까지 아이들의 시선은 그 소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외지인들이 역병을 옮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아이들은 이제 그런 걱정은 온데간데없고 소녀가 마을에 나타난 것이 큰 축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겼다. 몇 시간을 사이에 두고 아이들의 분위기가 너무 확 바뀐 것이 이상할 노릇이었다. 경운기가 기와집으로 사람들을 태우고 들어간 후 한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모래톱 마을은 다시 평온을 되찾고 해는 서산으로 저물고 있었다.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을 가로질러 힘차게 날아다니는 어미 제비와 새끼 제비들의 그림자가 강 하류의 물살에 크게 비쳤다. 제비들은 모래톱 마을에서 새끼를 치고 비행 연습을 하며 강남으로 날아갈 준비를 하는 듯 유난히 자신감 넘치는 한여름날 저녁의 힘찬 날갯짓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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