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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꿈 Aug 06. 2021

15화.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그해 여름 못다 한 이야기



소녀의 가족들은 외할아버지와 함께 여름휴가 기간에 민가가 몇 채 있는 작은 섬으로 휴가를 떠났다. 혼자서 바다 수영을 하던 소녀는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바람결에 들려오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고, 다리에는 쥐가 나서 뻣뻣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의 외할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작은 섬에 사시다가 오래전에 뭍으로 나오셨다고 하였다. 그곳 섬에는 옛날에 살던 집을 수리하여 휴가철이면 별장으로 사용하는 집이 한 채 있었다. 섬에 있는 별장에는 건물을 관리하는 사람과 해녀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근에 살면서 별장을 지키고 있었고, 양식장 조업에 필요한 동력선인 목선 한 척도 가지고 있었다. 이번 휴가철에는 별장에서 목선이 모래톱 마을까지 와서 소녀의 가족들을 섬으로 싣고 갔다.


남도지방은 해안가에 수많은 섬들이 점점이 보석처럼 흩어져 있었 별장이 있는 섬 앞에는 작은 무인도도 하나 있었다. 그리고 신비한 전설의 섬도 건너편에 멀리 떨어져서 희미하게 보였는데 모래톱 마을에서 보이는 쪽의 반대편인 그 섬의 뒷부분이 보였다. 또, 밀물과 썰물의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사리 때는 바닷물이 빠져 섬의 형체가 크게 드러나게 되었는데 별장이 있는 섬과 앞에 있는 작은 무인도는 물이 빠지면 뭍과 뭍이 서로 연결되기도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바다 수영이나 낚시도 할 수 있어서 여름철에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소녀는 휴가철을 맞아 별장이 있는 섬에서 바다 수영도 배우고 앞에 있는 작은 무인도에 가서 조개나 해산물을 채취하며 평소에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체험을 하고 싶었다.


외할아버지는 소녀를 데리고 물이 빠져 뭍이 된 별장 앞 무인도에 긴 장화를 신고 걸어서 건너갔다. 사리 때가 되어 물이 빠진 모래톱에서 조개도 캐고 항아리나 통발에 들어 있는 문어나 바다 게를 잡기도 했다. 낙지는 갯벌에서 구멍을 찾아 호미나 삽으로 주변을 넓게 파서 잡아야 했다. 소녀는 색다른 체험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러 가지 해산물을 채취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일이었는데 오랜만에 무인도에서 정말 즐겁고 유익한 해양체험을 하였다. 소녀는 단이랑 모래톱 마을 아이들이 바다 수영을 잘할 뿐만 아니라 깊은 바다에도 자신감을 갖는 게 무척 부러웠다. 서울에 있을 때 실내 수영장에서 여러 가지 영법을 배웠지만 바다에서는 시도해본 적이 없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는 이번 기회에 바다 수영에 적응하여 울렁이는 파도와 검푸른 바다에 대한 자신감을 확실히 갖고 싶었다.


별장에 온 다음 날 오후 소녀는 해녀일을 하는 분과 함께 해산물을 채취하러 갯바위 근처로 가는데 따라나섰다. 바다 수영을 평생 해 온 분들이라 소녀가 바다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바다 수영은 실내와 달리 수심이 깊고 파도가 거칠기도 하니 한 순간도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우선 숨을 쉴 때 바닷물을 들이마시지 않도록 호흡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깊은 바다는 수면 밑을 보면 두려움이 생길 수도 있으니 바다 밑은 보지 말고 수면 위 앞쪽을 바라보며 목표 지점을 향해 헤엄치는 것이 좋다고 일러주었다. 이틀 정도 해녀들과 함께 바다에서 자맥질도 하고 물에서 놀면서 적응하다 보니 소녀는 혼자서도 깊은 바다에서 수영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형으로 파도가 없는 날은 먼 곳까지 수영이 가능하여 별장 맞은 작은 섬까지 수영으로 횡단했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

 

다음 날은 휴가를 마치고 모래톱 마을로 돌아가야 해서 소녀는 해가 넘어가는 어스름한 저녁인데도 혼자서 수영 연습한 번 더 해보고 싶었다. 소녀는 수영 장비를 챙겨서 빠른 걸음으로 바닷가로 내려갔다. 해는 서쪽 하늘로 넘어가고 있었고 붉은 저녁노을 너머 전설의 섬은 멀리 안갯속에 휩싸여 섬의 일부분만 어렴풋이 보였다. 소녀는 바닷가에 도착해 저녁노을이 지는 바다에서 마지막 수영 연습을 하며 자맥질도 몇 번 하고 있을 때였다. 소녀가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긴 호흡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알 수 없는 시선이 느껴졌다. 해녀들이 해산물을 채취할 때처럼 물속으로 자맥질을 하고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그때 소녀의 눈에 뭔가가 자신을 지켜보다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소녀는 전설의 섬을 찍은 사진 속에 보였던 이상한 형체가 생각나면서 몸이 한순간 뻣뻣해지며 다리에 쥐가 나고 소름이 돋았다. 소녀는 이곳 어딘가에 자기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소녀는 하던 수영을 멈추고 물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어떤 사람이나 인기척도 없었다. 자기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소녀는  번 더 자맥질을 하고 물속에서 나와 천천히 별장을 향해 해안가 바닷길을 걸어갔다. 아까 그 이상한 느낌은 엉뚱한 상상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위로하며 소녀는 해가 지는 저녁노을을 뒤로하고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별장으로 향했다.



소녀가 해거름에 별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또다시 무서운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까 누군가가 헤엄치고 있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이상한 느낌이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목소리가 가늘면서 희미하게 다시 들리는 것 같았다. 소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바람결에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의 정체에 신경이 곤두섰다. 갑자기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몇 번을 두리번거려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소녀는 다시 해안길을 따라 별장으로 빠르게 걸었다. 어둠은 점점 내려앉고 겁도 나서 아까보다 좀 더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바람을 타고 그녀의 등 뒤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목소리가 분명한 것 같았다.

"누구세요? 당장 나오세요."라고 하며 소녀는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 수영을 할 때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정말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니 소녀는 갑자기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숨이 막힐 듯이 긴장되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별장까지 갈려면 어스름한 저녁길을 십여 분은 더 걸어야 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렸지만 어둠이 내리는 해안길을 두리번거리며 서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목소리가 귓전을 또 때리며 자신을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누구세요, 누구냐니까?"라고 고함을 치며 달렸다. 그때였다. 외할아버지가 저 앞쪽 별장 울타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설아, 누구를 그렇게 찾는 거니?"라고 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영은 재미있었고? 이마에 식은땀은 왜 이렇게 흘렸니?"라고 하시며 소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제야 소녀는 이마에 솟은 땀을 옷소매로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라고 말끝을 흐리며 별장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소녀는 별장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전설의 섬이 보이는 곳에서 혼자 수영할 때부터 누군가가 그곳에서 자신을 몰래 지켜봤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사진 속에 담긴 이상한 형체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찍혔는지 숱한 의문들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났다. 아까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희미하게 들렸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목소리는 과연 누가 그랬는지, 그 소리의 정체궁금하기만 했다. 저녁이 되자 서쪽 하늘에 먹구름이 생겨 별장 쪽으로 몰려오더니 소나기를 뿌리고 바람도 가끔 세차게 불어닥쳐 유리창이 흔들리기도 했다.


소녀는 별장에 휴가를 와서 바다수영도 배우고 해녀들과 함께 바다 적응 체험도 잘 마무리하였다. 이제 하룻밤만 별장에서 묵으면 모래톱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다. 모래톱 마을 아이들 생각을 하며 침실에 들어와 소나기가 유리창을 치는 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으며 누워 있었다. 그런데 잠시 후 혼자서 눈을 감고 있던 적막한 밤에 갑자기 방에 있는 창문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소나기와 함께 지나가는 바람인가 하고 다시 눈을 감고 있었는데 갑자기 선반 위에 둔 부채가 휙 떨어져 내렸다. 놀라서 눈을 뜨니 맞은편에 있는 옷장문이 스르르 열렸다 닫히는 것이 아닌가. 소녀는 불현듯 조금 전 자맥질할 때가 떠올라 긴장이 되면서 머리칼이 쭈뼛쭈뼛 서는 것 같고 잠은 달아나버려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군가가 자기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두렵고 무서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누가 과연 소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인지, 또 그것이 사실인지 그런 생각에 골몰하니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잠도 오지 않았다.


소녀는 전설의 섬이 지닌 신비롭고 무서운 소문들이 자신을 짓누르며 조여온다는 상상을 하면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고통에는 질량이 없다. 고통으로 느끼는 감정의 강도만이 오직 존재할 뿐이다. 감정을 다스리면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기에 소녀는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모든 의문들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자맥질할 때 들은 소리는 잘못 들은 것이고, 조금 전에 부채가 떨어진 것이나 옷장문이 열리고 닫혔던 것은 바람 때문이라 여기려고 했다. 하지만 머릿속의 생각만으로는 그러한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며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소녀는 기꺼이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소녀는 나약하거나 비겁하지 않았다. 전설의 섬과 관련해 자기 주변에서 생기고 있는 우연한 일들이 두렵기는 하나 결코 피해 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녀는 상상의 나래를 펴는 공상 과학을 좋아했으며 세상의 이치는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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