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모래톱 마을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기차여행으로 휴식을 취하며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며칠간의 휴가로 인해 나른한 몸이 된 소녀는 이상한 꿈속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소녀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에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해 여름을 떠올려보았다. 아름다운 장면들이 그림처럼 지나갔다. 그해 여름의 숱한 기억들은 한 편의 영화처럼 변화무쌍하였다. 소녀는 눈앞에 펼쳐지는 놓치고 싶지 않은 장면들을 손으로 잡으려다 허공만 휘저었다. 도깨비불을 피해 높은 언덕을 한순간에 뛰어넘어 내달렸던 순간이나 혼자서 바다 수영을 하던 날 어둠이 내려앉을 때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가늘고 희미한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했던 순간도 지나갔다. 그때 동굴 위에서 소녀의 외할아버지가 "은로야! 은로야!"하고 단이 할아버지 이름을 고함치며 불렀다. 그 소리에 소녀는 벌떡 눈을 떴다. 기차 안에서 잠깐 졸다가 꿈속에서 외할아버지의 고함치는 소리에 그만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잠결에 '은로야! 은로야!'하고 들렸던 단이 할아버지 이름을 다시 떠올려보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단이 할아버지 이름인 '은로(銀露)' 속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어있는 것일까? '로단(露丹)'의 이름에도 '로' 자가 들어가는데 단이 할아버지로부터 생긴 것인가. 그렇다면 '은(銀)'자를 이름으로 하는 다른 아이도 있단 말인가. 이런저런 궁금증이 갑자기 생겨났다. 기차는 아련한 추억을 뒤로한 채 서울로 달리고 있었다. 소녀는 부모님께 자신의 이름이 '은설(銀雪)'이라 지어진 내력을 여쭈어봤다. 부모님께서는 소녀에게 너 이름은 외할아버지께서 귀하게 지어주신 거라고 하시며 소녀의 이름이 지어진 내력을 들려주었다.
부모님이 소녀를 가졌을 때 외할아버지께서 어떤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때가 오월인데도 불구하고 골짜기에 하얀 눈이 쌓여 있는 것을 태몽으로 꾸었다는 것이었다. 하도 이상하여 외할아버지께서 소녀의 이름에 "눈 설(雪)" 자를 붙이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러자 소녀는 '은(銀)' 자는 어떻게 지었는지도 물었다. 그랬더니 소녀의 어머니는
"하얀 눈의 색깔이 은빛이고, 또···."라고 하시면서 말끝을 흐렸다. 소녀는 또 다른 내막이 있는 것 같기도 해 재차 여쭤봤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소녀에게 전해주었다.
"사실은 단이가 먼저 태어나고 네가 태어났는데 단이 할머니께서 외할아버지께 손자 이름을 부탁했단다. 그래서 단짝 친구인 단이 할아버지의 실종을 비통해하며 그를 기리기 위해 '은로(銀露)'라는 이름 속에 있는 '로(露)' 자를 따와서 신비의 섬이 있는 서쪽 하늘의 붉은 기운을 상징하는 '단(丹)을 합쳐 로단(露丹)이라고 지어줬단다."라고 하셨다. 그런 후 몇 달이 지난 뒤 오월에 네가 세상에 태어났단다. 그리고 그때 피부가 백옥같이 하얗게 태어난 너에게 하얀색을 상징하는 '눈 설(雪)'과 은빛과 달빛을 상징하기도 했던 단짝 친구인 단의 할아버지 이름에서 '은(銀)' 자를 가져와 너의 이름을 '은설(銀雪)'로 지었다고 하셨다.
결국 소녀와 단의 이름 어딘가에는 신비의 섬에서 실종됐다가 살아난 단이 할아버지 이름인 '은로(銀露)'가 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끈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있었는데 그 속에 은설(銀雪)이와 로단(露丹)이도 희미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소녀는 왜 자신이 시골 마을에 내려와서 신비의 섬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자신의 귓전에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가느다란 목소리는 또 왜 그런 것인지도 의문을 품었다. 그 희미한 목소리는 여름 내내 밤마다 소녀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었다. 그런데 소녀가 서울에 올라오고 며칠이 지난 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자기 집 우편함에 단으로부터 편지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소녀는 책가방을 멘 채로 편지를 황급히 뜯어보았다. 단이가 보낸 편지에는 그해 여름의 아름다운 날들을 추억하며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꼭 다시 모래톱 마을로 내려오기를 바란다는 절절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소녀를 만나기 전에 어느 날 오후 원두막에서 잠깐 낮잠이 들었는데 그때 꿈속에서 소녀를 본 것 같다며 자신의 '어떤 꿈' 이야기가 편지에 낱낱이 적혀 있었다. 단이는 자신이 마을 어귀 느티나무 쪽에서 소녀를 처음 봤을 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어서 무척 궁금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꿈속에서 본 것 같았다고도 했다. 소녀는 단이가 보내온 편지에 적혀 있는 꿈 이야기를 읽어보며 외할아버지께서 자신의 이름을 작명한 연유에 대해 어머니께 들은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현기증이 생겨 갑자기 몸을 움츠렸는데 소녀의 팔뚝에는 소름이 돋았다. 소녀는 단이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단의 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미스터리가 또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의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모래톱 마을에 가기 전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아이인데 어찌하여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의문을 품게 되었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이 할아버지 이름 속에 소녀와 단의 이름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단의 꿈속에 소녀가 비친 것 같다니 이런 황당한 일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소녀는 그해 여름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려보며 풀리지 않은 의문들을 파헤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두렵기도 하고 식은땀을 흘리며 가슴 조마조마하게 했던 그 목소리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고 들렸던 희미한 울림이 소녀의 귀에만 들렸다면, 그 이상한 소리의 정체도 꿈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해 여름의 모든 일들이 이상하게 여겨지고 신비스럽기만 했다.
소녀가 모래톱 마을에 내려오기 며칠 전 단의 꿈에 자신이 나타난 것이나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선인이 소녀에게 물을 얻어먹었다는 말들이 꾸며낸 이야기처럼 너무 이상했다. 단의 꿈속에서 선인은 왜 소녀를 뚫어지게 쳐다봤을까? 단순히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온 천지간의 기운과 정기를 관장했던 선인은 누구였으며, 그가 소녀의 영특함을 미리 알아보기라도 했었단 말인가.
소녀는 예전에 보았던 영화 속에서 신비스럽기만 했던 빙의라는 현상이 떠올랐다. 그때 본 기억을 더듬어보니 빙의는 다른 것에 몸이나 마음을 기대거나 영혼이 옮겨 붙는 현상이었던 같았다. 무지개를 타고 내려온 선인이 모래톱 마을이라는 공간에서 소녀와 단을 의도적으로 만나게 했단 말인가. 어떤 힘이 작용하여 소녀와 단은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을 돈독히 하고, 전설의 섬 동굴 속에 있었던 단의 할아버지도 구하도록 한 것일까. 지난여름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 일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해 여름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갑자기 이상하다는 생각에 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소녀가 즐겨 읽었던 역사이야기 중에 신화에 얽힌 글에서 천우신조라는 말이 자주 등장했던 것이 떠올랐다. 온 우주와 하늘과 신령의 도움이 있으면 간절히 바라는 일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비현실적인 소망들도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질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비의 섬 해역에서 실종되었다가 생존하게 된 노인은 하늘의 도움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심해 해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았으며 또 그렇게 모진 고통과 고독을 이겨내고 동굴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떤 꿈' 이야기가 적혀 있는 단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소녀의 귓전에 울렸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라는 목소리도 영적인 힘에 의해 누군가가 소녀에게 구원을 청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소녀는 그해 여름에 겪었던 일들이 너무나 미스터리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궁금할 뿐이었다.
소녀는 세상의 이치와 모든 일이 과학으로 증명된다고 믿어왔지만 지금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나 단의 이상한 꿈에 관한 이야기는 과학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것이었다. 하지만 숲 속의 인간 오랑우탄이 1km 전방까지 자신의 영역을 암시하는 신호를 보낼 수도 있다고 하니 만일 어떤 인간이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인들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았다. 과학과 영적인 힘의 경계라는 것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일 그런 경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그 간극이 좁혀질 수도 있거나 그런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인간도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우주 안에 있는 온 천지간의 만물과 자연현상이 정기를 한 곳으로 모으면 누구든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말도 있으니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해 여름!
소녀는 자신이 영적인 어떤 힘을 빌려 전설의 섬에 대한 의문을 풀어간 것은 아닌지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되돌리며 회상해보았다. 단이 할아버지를 구조할 수 있게 된 것도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어떤 힘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그해 여름을 시골 마을에서 보내고 서울에 올라온 소녀는 과학과 영적 세계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녀는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 영적 세계에 관한 책에서 '영혼'이라는 것에 관해 찾아보았다.
책에서는 '영혼'이란 '정신'과 구별되는 일종의 생명의 원리, 살아 있는 사람의 육신에 깃들어서 생명을 지탱해준다고 믿기도 하는 기(氣), 육신의 죽음과 무관하게 그 자체의 실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능력 등을 의미하며, 영혼은 초월성을 지닌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뜻으로 혼ㆍ혼령ㆍ혼백ㆍ얼ㆍ넋 등을 제시하고 있었다. 소녀는 이러한 영적 표현과 모래톱 마을에서 행해지고 있었던 장승제와 해신제의 의미도 되새기며 떠올려보았다. 시골 마을에서 주기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제사는 영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단 말인가. 또 다른 책을 열람해보니 마음의 이치를 탐구하는 심리학자 칼 융(Jung, Carl Gustav)은 '영혼'을 인간의 외부에서 내부로 들어와 생명의 원리로 작용하는 실체로 보고 '정신'과 다른 것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영혼은 ① 스스로 자발적인 운동과 활동을 하며, ② 감각적인 지각에 의존하지 않고 이미지를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③ 이러한 이미지들을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영혼은 인간의 창조물이 아니며, 외려 인간은 영혼의 활동을 통하여 창조적인 능력을 부여받는다고도 하였다.(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소녀는 그해 여름 모래톱 마을에서 다양한 경험과 체험을 통해 자신의 외부에서 생긴 새로운 자극들을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삼라만상 우주 속에 인간의 눈에 보이는 태양과 같은 별은 약 4%에 지나지 않는다는 설도 떠올려보았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에서 인간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주 전체를 봤을 때 세상을 보는 기준이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인간이 눈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기준과 다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소녀는 어떤 영적인 힘의 작용으로 모래톱 마을에 내려오게 되었고, 전설의 섬을 탐험하는 창조적 능력을 부여받기라도 했단 말인가.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 우주와 그 속의 작은 별인 지구, 그리고 그곳에서 만물의 영장이라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생각하며 소녀는 도서관 문을 나섰다.
《글 속으로 들어가기》
소녀와 소년은 어떤 연결고리로 얽히고설켜 있는지 '그해 여름'이라는 작품의 스토리를 참고하여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세상의 이치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서로가 가진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토론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