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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간병일기 10

유품


유품


장례식 후 내 집으로 올라온 나와 달리 세 자매가 남아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기로 했다. 일이 있어서기도 했지만 나는 그동안 엄마를 돌보며 몸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생각하는 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답답증과 서운함이 마음을 병들게 하고 급기야 몸으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참고 숨죽인 거에 비해 상대는 필터를 거치지 않고 불평을 표현했다. 문제는 그 간극의 차이 때문에 항상 일어난다. 

상대는 별 사심 없이 한 말이나 행동에도 나는 불화살을 맞은 듯 데었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일지 모른다. 예를 들자면, 간병이 길어지니 당연히 차후가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도 나는 엄마의 수명이 단축되길 기다리는 말처럼 들려 속으로 울었다. 왜 기다리지 못할까. 어차피 내가 책임지고 간병하려 내려갔고 길어지더라도 그건 내 몫이 될 텐데. 

같이 있지만 단 한 번도 나를 대신해 엄마의 밤을 지키겠노라 나서지 않는 아들에 대한 짝사랑을 눈치챘으면서도 모른척했다. 그건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지 시켜서 할 일이 아니었다. 그건 아들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들과 딸 사이 세심함의 차이일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충고나 조언에 익숙하지 않은 성격상 자칫 불화의 빌미가 될 수 있고 그건 내가 가장 신경 쓰는 일이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던 엄마는 마지막 밤 기어이 절규하듯 말했다. 

“이 집 식구들은 다 어디 간 겨?”

고통스러운 그 순간 엄마의 생각을 짐작하니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엄마에겐 마지막까지 ‘이 집 식구’는 내가 아닌 아들과 며느리였다. 당신과 있는 동안 단 하루도 편하게 못 자고 매일 밤 뜬 눈으로 새우다 시피 한건 나였지만 엄마의 심정적인 보호자는 여전히 아들 내외였다. 평생을 아들 하나 보고 살아오신 분이다. 그러니 그 아들이 얼마나 야속했을까. 시어머니의 사랑을 끝내 인정하지 않고 마음을 주지 않은 며느리에게 얼마나 섭섭했을까. 끝끝내 내게 의지해야 했던 그 마음이 얼마나 미안하고 서글펐을까. 그 모든 걸 겪었던 나는 덮고 외면하고 이해하느라 속이 너덜너덜 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단 하루도 더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돌보던 그 방에 있으면 엄마가 다시 살아나 나를 붙들고 사정할 거 같았다. 나는 도망치는 자의 마음으로 고향집을 떠났다.


삼우제는 따로 지내지 않고 봉안당에 모여 잠시 엄마를 생각하고 끝냈다. 세 언니를 바래다주고 내 집에 와서 내 몫의 유품을 풀어보았다.

엄마를 돌보며 내가 산 혈압계

미처 입지 못한 새 팬티 두 장

아주 오래전 안면도 꽃 박람회 모시고 갔을 때 아버지랑 함께 찍은 사진 다섯 장

내 고등학교 3학년 때 받은 임명장

내가 결혼하고 바로 일본에 건너가 살 때 보낸 편지 한 통

엄마가 새 각시 때부터 썼을 무명실이 감겨 있는 실패 하나

내 몫의 유품 중 그나마 정말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자매들이 양보해 준 그 실패가 유일한 것이리라. 나는 어쩌면 이렇게 유품마저 궁색한가. 어째서 내 부모는 자식에게 실패 하나 밖에 남겨주지 못하는가. 어째서 내 어머니는 그 오랜 세월 살면서 딸들에게 반듯한 그릇 하나 못 물려주셨을까. 

막내딸 시집가는데 바늘 하나도 해주지 못하는 미안함에 논을 물려준다던 약속을 아버지는 지키지 못했다. 엄마는 당신이 평생 쓰던 실패 하나를 남겼다. 마치 내 인생 통틀어 성적표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 

부모에게 대단한 유산이나 유품을 기대한 게 아니었다.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기분 때문에 그때도 지금도 아프다. 그냥 평생 아들로, 장자로 태어나지 못해 받은 설움을 끝끝내 증명하는 것 같아서 서글펐다. 

몇 해 전, 결혼 전에 엄마에게 해드린 비취반지가 내게로 왔다. 마을에 도둑이 들어서라고 했지만 그때부터 엄마는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내가 해 줬으니 내 몫이 됐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엄마 바라기인 내게 미안함 때문인지 그 속을 알 수 없지만 그때도 얼마 되지 않는 금붙이는 며느리에게 갔다. 그건 물론 딸들이 해준 거였다.

평생을 그런 사고로 살다가셨고 그 세대는 이제 끝났다. 나를 더 이상 서럽게 할 상대가 사라진 것이다. 끝나는 순간까지 아들바라기였던 엄마, 그럼에도 나는 그런 엄마를 미워할 수 없어서 아프다. 

3주를 꼼짝없이 앓았다. 감기몸살과 가벼운 폐렴증상까지 내 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장례식 이후에도 엄마를 보내는 과정이 그렇게 연장되었다. 부모 잃은 자식에게 애도의 기간이 어찌 그 기간뿐일까. 나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마음으로 아플 진단을 받아놓은 환자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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