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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간병일기 9

고아가 됐다

고아가 됐다.

내 나이 쉰다섯, 원하든 원치 않든 기대수명이 90세를 넘긴 시대에 살고 보니 앞으로도 살아갈 날이 까마득한데 이제 남아있는 동안 부모 없는 고아로 살아야 한다. 사실 이 나이에 고아타령이라니 얼마나 염치없고 겸연쩍은 말인가. 그럼에도 마치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큰 상실감에 순간순간 아찔해지곤 한다. 지금까지 부모란 존재는 특히 엄마란 존재는 평생 죽지 않고 영생을 사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문상 온 사람 중에 그래도 호상이라는 말로 위로하는 이들이 있었다. 복을 누리며 별다른 병치레 없이 오래 산 사람의 상사를 호상이라고 한다면 엄마는 호상이 맞지만 자식에게 부모의 상이 호상이라는 말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 그 ‘무엇’을 상을 치르고 나서 매일 같이 느끼고 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중앙현관으로 들어서다 발이 딱 멈췄다. 현관 옆으로 붉은색 영산홍이 눈부시게 피었다. 몇 해 전 내 집에 와서 생신을 치른 후 엄마는 낮 산책하다 꽃 앞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영산홍처럼 밝은 색 점퍼에 연분홍 모자를 쓰고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얹은 엄마가 조심스럽게 웃었다. 그때처럼 영산홍은 피었는데 이제 그 앞에 포즈를 취할 엄마가 없다니. 다리가 푹 꺾이고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공동 현관 옆 꽃 무더기 앞에 음식물쓰레기통을 든 채 눈물이 터져버리는 그런 순간. 그건 엄마를 잃어보지 않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장례식 후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먹었지만 몇 시간이 지나도록 잠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됐다. 그 밤의 순간순간 생각 속을 떠나지 않던 엄마가 바로 불면의 원인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백수를 누리다 떠났으니 미련이 없을 줄 알았다.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너무 쉬운 판단이었다.

장례식을 치른 후 시작된 감기몸살이 점차 심해지고 급기야 폐렴증상까지 나타나 며칠을 앓아누웠을 때도 머릿속은 온통 엄마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엄마 한 사람 떠났을 뿐인데 나는 너무도 많은 관계들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같이 자란 기억이 없는 내 늙은 동기간들과 무리 없이 어울린 것도 엄마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오라비에 비해 보잘것없는 늦둥이 막내로 존재감 없이 태어났지만 그 역시 부모 인연이다. 내 효의 근본이었던 질투의 힘도 이제 추진체가 떨어져 나가 기능을 상실했다.

나는 당분간 고향을 찾지 않을 것이다. 늙어가는 여자에게도 친정엄마가 필요하고 친정이 뒷배가 될 거란 걸 잃고 보니 알겠다. 친정엄마 없는 친정은 이제 더 이상 친정이 아니다. 방치된 우물처럼 부유물만 쌓여 기능을 못하게 될 것이다.

죽도록 아프고 나니 몸살 맘살의 괴로움도 받아들이게 됐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와 엄마를 잃었을 때의 느낌이 그 몸살의 정도만큼 달랐다. 엄마를 잃는 큰일을 겪고 어찌 그만큼 아프지 않고 지날 수 있을까.

봄의 시작을 미처 알아채기 전에 간병을 시작해 보내드리고 보니 벌써 봄이 한창 무르익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봄은 희망의 봄이 아니고 엄마를 잃은 계절로만 기억될 것이다. 목련이 피기 시작해 떨어지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고 영산홍이 절정일 때 보내드렸으니 봄꽃이 서럽기 짝이 없다.

나는 언제까지 아플 텐가?

나는 언제까지 엄마 손 놓친 어린아이처럼 망연자실할 것인가.

나는 언제까지 눈물을 흘리고 꺼이꺼이 생소한 소리를 내며 울 것인가.

나는 언제까지 이 슬픔이 당연하니 날 좀 그냥 내버려 달라고 떼쓸 것인가.


느지막이 일어나 비틀거리며 거실에 나왔을 때 남편이 가지런히 다림질 한 십 여장의 셔츠를 보고 문득 깨달았다. 나만 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내가 온전히 엄마를 간병하고 온전히 엄마를 보내고 슬픔을 견디는 동안 나 혼자 겪은 게 아니었구나. 내가 그럴 수 있도록 내 가족이 나의 뒷배가 돼주고 있었구나.          

반짝하고 전구 하나가 켜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제 엄마 없이도 잘 살아가는 어른이 되겠구나.

몸이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열하루 만에 첫 외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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