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마지막 간병일기 8

세상에서 가장 슬픈 배웅

2024년 4월 16일,  2월 22일 엄마의 생체 시계가 머지않아 멈출 거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54일 만이었다.

3월 9일 입원과 함께 시작된 전담 간병을 시작한 이후로는 38일 만이었다. 38일 중 주말을 이용해 사나흘 내 집에 다녀간 날을 빼면 나는 내내 엄마와 함께 있었고 엄마를 돌보는 전담 간병인이었다.

그날 엄마는 여느 때와 달랐다. 복통이 올 때마다 참지 않았다. 아픈 만큼 표현했고 평소와 달리 짜증을 내기도 했다. 서서히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서둘러 먹었다. 오빠 부부에게도 엄마의 심각함을 알렸다.

수시로 혈압과 맥박을 체크했다. 아직은 정상 범위 안에서 약간씩 변화가 있었다. 손과 발이 차가워지기 시작했고 자정 이후부터 혈압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맥박은 정상범위보다 약간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집에는 분명 네 사람이 있었지만 죽음과 싸우는 건 엄마와 나 둘 뿐이었다.

“객구 물려, 득실득실 몰려왔다.”

나는 그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알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이 컸다. ‘객구’는 객귀客鬼를 말하고 엄마가 말한 ‘객구 물린다’는 객귀를 물리치는 비방을 말하는 거다.

엄마는 객구가 자신의 배를 쥐어짠다고 호소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무어라도 해야 한다는 간절함에 엄마에게 방법을 물었다.

엄마는 된장국이라도 끓여 마당에 뿌리라고 했고. 김치 국이라도 끓이라 했다. 나중엔 하다못해 맹물이라도 끓이라고 졸랐다. 오죽 고통이 심했으면 그랬을까. 엄마의 복통이 귀신의 장난이라고 믿는다는 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단지 미신행위라고 믿으면서도 한편으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럼에도 나는 된장국도 김칫국도 끓이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는 엄마를 붙들고 있어야 했고 여차하면 병원에 가야 할 짐도 싸야 했다.

다음날 출근을 해야 하는 오빠 부부가 옆방에서 자고 있지만 깨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상황을 온몸으로 겪어야 하는 엄마와 나 만이 괴롭고 아플 뿐이었다. 언제쯤 두 사람을 불러야 할지 고민했지만 결국 임종 직전 부르자는 결론을 내린 후였다. 어차피 내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얼떨결에 물을 한 번 끓여 마당에 버렸다. 된장국도 김칫국도 끓이지 않았지만 엄마 말대로 했다고 거짓말했다. 엄마가 깜빡깜빡 혼절한 듯 잠에 빠질 때 한 것처럼 엄마를 속였다. 엄마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고 무엇보다 정말 악귀가 엄마에게 몹쓸 짓을 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경련

입이 이미 닫혀버려 말을 할 수 없는 엄마가 몸을 일으키라고 눈짓으로 말했다.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엄마를 일으켜 안고 있었다. 엄마가 팔다리를 가볍게 떨었다. 경련을 일이 키는 거였다. 덜컥 겁이 났다. 이제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를 그대로 두고 부르러 갈 수 없는 상황이라 오빠에게 전화했다. 오빠 부부가 달려왔다. 잠시 후 경련이 멎고 다시 자리에 눕혔다.

혈압을 체크했다. 역시나 높은 쪽 혈압이 60대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올케가 다시 자러 가고 오빠와 둘이 엄마를 지키고 있었다. 두 시간쯤 후 다시 일으키라 했고 경련이 일어나고 안고 있기를 반복했다.

잠시 진정된 사이 4시쯤 자매들에게 보낼 카톡 메시지를 써놓았다. 엄마가 위독하다면 당장 달려올 테지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엄마의 상태가 그런 줄 알고 있고 마음의 준비들을 하고 있을 텐데 임종 지키는 걸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때 부르는 게 의미가 있을까?

다시 진정되고 엄마 웃옷을 갈아입혔다. 그동안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낯선 냄새가 엄마에게 났다. 그 냄새는 어느새 내 손에도 배어있었다. 불과 몇 시간 동안 엄마가 괴로워하면서 흘린 진땀 냄새였을 것이다.

출근을 해야 할 상황이 올 수 도 있으니 일단 옆에서 자라고 일렀다. 오빠가 잠들어도 엄마와 나는 잠들 수 없는 밤이 계속되고 있었다.

5시쯤 돼서 이미 써놓았던 메시지를 결국 자매들에게 보냈다. 엄마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으니 날 밝은 대로 와서 한 번씩 더 보는 게 좋겠다고. 그때까지도 나 역시 믿지 않았다. 언니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충분할 줄 알았다. 엄마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이니까. 그렇게 쉽게 죽음의 문턱을 넘을 리가 없다.  

7시쯤 세 번째 경련이 시작되기 전부터 엄마를 안고 있었고 경련이 있은 후에도 왠지 엄마를 놓을 수 없어 계속 안고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 몸을 눕히자 잠시 후 숨을 쉬지 않았다. 오빠가 울면서 부르자 다시 숨을 내쉬었지만 그 숨은 몇 초 지나지 않아 다시 멈췄다.

엄마는 그렇게 나와 오빠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엄마가 원하고 우리 가족 모두가 바라는 방식의 운명이었다. 주렁주렁 호스를 달고 의료진에 둘러싸여 차가운 중환자실이 아닌 당신이 평생 살아온 당신 방에서 잠자듯 그렇게.

물론 그 밤 고통의 순간도 있었지만 99년 삶을 마무리하면서 그 정도 고통만 겪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자위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운명을 타고나는 거라 믿는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엄마는 조용하고 따뜻하지만 내면이 강하고 반듯한 사람이었다. 누워 있을 때 그만하면 잘 살았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에누리 없이 타고난 만큼 전력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몸소 실천하셨다.

나는 지금 몹시 혼란스럽다. 핑계 대지 않고 미루지 않고 엄마를 감당해서 잘 보내드린 거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함께 어쩔 수 없이 가져야 하는 서운함과 섭섭한 마음을 다스리는 중이다. 누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정과 능력대로 산다. 내 기준에 맞지 않다고 비난하거나 섭섭해할 일이 아니다. 효도를 받을 주체는 엄마였고 못 미친 효도는 각자 감당할 몫이다. 그러니 내가 잘잘못을 따지는 건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아픈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이제 나는 고아가 됐고 효도란 건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이전 08화 마지막 간병일기 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