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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글쓰기 여행자
Apr 16. 2024
엄마의 주간병인이 된 것은 자처했다기보다 물의 흐름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같이 사는 아들 내외에게 의존할 수 없는 데다 다른 언니들은 그들 역시 노인으로 자신들 몸을 챙기는 것도 버거운 나이다.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이 노인을 간병하는 일은 비단 우리 가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성격상 눈치를 살피고 계산하며 사는 일을 못한다.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계산 없이 달려들고 본다. 눈치 보며 뒤로 빼는 것보다 그게 편하다. 몸이 불편한 대신 마음이 편한 걸 선택하는 게 여러모로 내게 맞았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다른 자녀들 역시 최선을 다해 엄마를 간병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엄마를 간병하면서 다른 자녀의 무관심과 마주한다면 그건 나로 하여금 무기력에 빠지게 할 것이고 불합리하다고 불만을 표시할 것이다.
70이 넘은 세 언니가 적극적으로 나를 돕기로 한 것은 3주쯤 지난 후부터다. 사실 언니들은 서로 자신들이 있겠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조건이나 일처리 부분에서 그나마 젊은 내가 유리했고 지금까지 그래왔기에 자연스럽게 내가 남았다고 보는 게 맞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이는 언니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우린 엄마의 딸이지만 며느리에게는 시금치도 먹기 싫다는 시집 식구, 그것도 시누이들이 아닌가. 그런 시누이들이 몇 명씩 지키고 있다면 며느리의 부담은 일부러 헤아리지 않아도 뻔한 일이 될 터였다. 혼자 담당하는데 지칠 즈음 대안으로 제안한 것이 주중 간호와 주말 간호로 간병을 조정하는 거였다. 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언니들 셋은 돌아가며 주말을 맡으라 했다. 셋이 돌아가며 당번을 정하면 3주에 한 번씩이니 무리가 덜 할 거라 생각했다. 계획은 바로 받아들여졌다.
주중 간병인과 주말 주부의 생활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2주 차에 온 둘째 언니가 제안을 해왔다. 엄마의 상태가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으니 일주일은 주중간병 없이 푹 쉬다 오라는 거다. 수요일에 독일에 사는 제 언니에게 가는 둘째 배웅도, 목요일에 있을 문학회 행사에도 이미 불참통보를 한 상태였는데 마치 보너스로 없던 한 주가 새로 생긴 셈이 되었다. 일주일간의 스케줄을 조정했다. 배웅도, 문학화 행사도 참여를 확신했다. 그렇게 금요일 저녁 기분 좋은 컴백홈을 했다. 다음날은 마침 결혼 30주년 기념일이라 딸들과 외식도 하게 됐다.
무리 없이 넘어간다 생각하던 일요일 오후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상태가 심상치 않고 나를 찾는다는 거다. 바로 출발해야 했다. 남편과 딸들까지 전 가족 동행이다. 친정까지 150여 킬로가 1500킬로처럼 멀게 느껴졌다.
도착해 보니 엄마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보였다. 간병 담당인 둘째 언니가 말했다. 내가 온다는 연락을 받은 이후부터 엄마가 안정되기 시작했다고.
엄마는 자꾸 어린아이처럼 변하고 있는 거 같다. 그러다 급기야 마치 어린아이가 주 양육자와 떨어질 때 느끼는 분리불안을 느끼는 건 아닐까.
자식이 여럿이어도 의지하는 자식이 있다더니 엄마가 그렇게 위중한 가운데도 나에게 의지하고 있었던 걸까.
결국 나는 다시 붙박이 간병인이 되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둘째 언니를 조카가 와서 모셔갔다. 같이 있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 언니는 분명 눈물을 뿌리며 갔을 것이다.
나는 나대로 울고 싶은 마음이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내 둘째 딸은 엄마가 살인 진드기 감염 됐을 때 고 3 수험생이었다. 병원을 옮겨가며 내가 엄마에게 몰두하는 동안 저 혼자 그 시기를 견뎠다. 그런데 이번에도 둘째는 내가 없는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대학 4년과 유치원 근무 3년간 쉼 없이 달려온 딸이 퇴직하고 한 학기 쉬기로 한 상태였다. 그 시기와 함께 나는 엄마의 간병을 맡게 된 거이다. 거기다 제 언니에게 가는 여행에 배웅도 못하게 됐으니 나는 아이에게 어쩔 수 없이 부채감이 생길 수밖에.
자식노릇 하는 것만큼 부모 노릇 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엄마에게 돌아설 수밖에 없는 건 엄마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