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의 합리적이고 산뜻한 축하방법
며칠 전부터 막내 앞으로 택배가 계속 오고 있다.
평소에도 쇼핑을 거의 인터넷으로 하는지라 그러려니 했는데 하루에 여섯 개씩 배달되는 의류엔 잔소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휴학하고 드라마 촬영 현장 조명팀 막내로 근무하면서 검은색 일색의 옷만 입는 데다 하루 열다섯 시간 이상씩 그 힘든 일을 해서 번 돈으로 허구한 날 의류 쇼핑이라니 납득하기 힘들었다.
“엄마, 그거 내 생일 선물로 친구들이 보낸 건데?”
오늘은 막내의 생일날이다. 2001년생인 막내는 한글날 태어났다. 우리 가족 넷이 주민등록 번호가 1과 2인데 반해 그 애의 앞자리는 4이다. 20세기 인간 넷과 21세기 인간이 한 가족으로 엮여있는 것이다. 그런 막내와 우리는 그야말로 한 세기의 세월만큼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더러 있다.
95년생, 98년생, 01년생 세 딸이 다 요즘 규정하는 MZ세대라고 하지만 내가 가장 실감하는 우리 집의 MZ세대는 단연 막내다. 같은 세대인 제 언니들조차 막내 동생의 소비형태와 마인드에 의아해할 때가 있다.
이번 생일에 막내는 어느 해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욕망을 어필했다. 독일에 있는 언니에겐 제가 원하는 빨간색 스니커즈를, 작은 언니에게는 빨간 데일리 백을 주문했다. (왜 갑자기 빨간색에 꽂혔는지 그것도 모르겠다) 아빠에겐 전날 저녁 외식을, 나에겐 미역국이면 족하다고 주문했다. 작은 언니가 주문하는 케이크는 내겐 이름도 생소한 파블로바 머랭 케이크. 한때 머랭 쿠키를 그렇게나 먹어대던 막내는 작은 언니로 하여금 지역에서 유일한 파블로바 케이크 판매하는 집을 찾아가게 했다.
오래된 얘긴데 그 막내가 5학년 제 생일날 나와 남편에게 뜻박의 선물을 했다. 이유를 묻자 생일은 제가 축하받아야 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저를 낳아준 부모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날이라는 기특한 대답을 했다. 그래선지 그때까지 축하만 받던 언니들도 다음 해부터 꼬박꼬박 감사선물을 하는 우리 집 룰처럼 되었다. 저희들 생일날 미역국은 엄마가 먹어야 한다면서 미역국을 끓여주는 이벤트를 하기도 했고 내 생일에는 선물은 물론이고 저희들이 미역국을 끓이고 생일상까지 차려줬다. 이번에도 막내는 가족들로부터 제 선물을 확실하게 챙기는 대신 우리 부부에게 지금 한창 공연 중인 <마틸다>를 예매해 주었다. 거기다 이번엔 통 크게 작은 언니까지 셋이 함께 보라고 꽤 큰돈을 쓴 것 같다.
그러니까 막내는 제 욕망을 주저하지 않는 대신 제가 해야 한다고 하는 것에도 주저함이 없다. 친구들에게 책과 의류 등등 제가 필요한 목록을 주고 가족들에게도 제가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요구했다. 누가 뭘 해준다면 그저. ‘됐다’, ‘괜찮다’ 거절이 되지 못하고 결국 주는 사람 고민에 빠지게 하는 것보다 얼마나 산뜻하고 합리적인 일인가.
해마다 가족들 생일상을 정성껏 차려줬으니 이번에도 몇 가지 요리를 해볼까 했더니 절대 싫단다. 갱년기로 안 그래도 확확 열 오르는 엄마가 불 앞에 서는 꼴을 보지 않겠다는 기특한 생각이라고 해석한다. 아무리 그래도 미역국만 끓이는 건 내 성에 차지 않는다 했더니 제가 직접 장을 봤다. 내 세대에나 먹었던 옛날 소시지에 제가 출장 중에 편의점에서 먹어봤는데 맛있더라며 대기업 고등어구이 두 개를 집었다.
“엄마, 옛날 소시지는 계란물만 입혀서 부치고, 미역국은 좀 짭짤하게 MSG 맛나게 끓여주세요.”
역시 욕구에 충실한 딸다웠다. 배달음식 좋아하고 매번 지방으로 촬영 다니느라 밖에 음식을 먹더니 제 생일 미역국이니 평소 간이 싱거운 내 음식에 제가 좋아하는 밖의 음식을 콜라보하는 정도의 주문인 것이다.
나는 그런 막내가 밉지 않다. 얄밉도록 주장이 강해 때로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지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손해 보는 삶에 익숙하고 불합리한 처사에도 벙어리 냉가슴 앓던 나를 닮지 않아 다행이고 받은 만큼 베풀 줄도 아는 인정을 실천하니 그 또한 다행이다.
제가 원한 것으로만 차려준 생일상을 거뜬히 비운 걸 보니 내 욕심이 참 부질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