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다 똥 된다

딸에게 주는 인생 레시피

도토리묵을 쒔다.

둘째 언니는 마크가 한국 왔을 때 자신이 만들어준 도토리묵이 다른 데서 먹어본 것보다 맛있더라는 말을 잊지 않고 내 출국 일에 맞춰 직접 빻은 귀한 도토리가루를 보내왔다. 나와 20년이나 나이 차가 있는 언니에게 지성은 손녀 같은 조카딸이다. 그런 조카가 결혼해 살림을 산다니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해보면 세상 쉬운 게 도토리묵 쑤기지만 몇 번이나 내게 전화해 레시피를 확인시켰다.

가루의 다섯 배 되는 물을 준비한다. 가루를 넣고 고루 저어 잘 푼다. 레인지에 올린 후 살살 저으면 잠시 후 보글거리며 끓는다. 마치 용암의 마그마가 끓어오르듯 퐁퐁 솟았다 터지면 소금을 조금 첨가하고 참기름을 한 바퀴 휘익 두른다. 이렇게 쉬운 걸 못한다면 지성은 내 딸이 아니지.

지성 앞에서 시연해 보였다. 다 쑤어진 묵을 네모반듯한 유리그릇에 담아 식게 놔두고 다른 볼일을 보고 들어왔다.

낮에 쑤어 놓은 도토리묵으로 묵무침을 했더니 둘 다 맛있게 잘 먹었다. 지성이 좋아하는 오징어 젓갈에 파와 양파 매운 고추 등을 쫑쫑 썰어 넣고 기본양념을 추가해 내놨다. 우리 집 여름 별미인 오이지를 처음 먹어본 마크조차 맛있다 연발이다. 아니, 이 게르만족이 어쩌다 한국 토종 입맛을 갖게 됐는지 자꾸 웃음이 났다.

먹는 내내 맛있다를 연발하는 지성이 짠한 마음이 들었다. 살림 몇 개월 만에 벌써 남이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다니. 내가 한 번씩 ‘세상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차려준 밥이고 남이 차려준 밥은 물만 말아서 먹어도 맛있다’고 했던 걸 잊지 않은 모양이다. ‘얘야 나는 그걸 28년째 해오고 있단다. 네 아빠처럼 입맛 까다로운 남자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일은 사법고시만큼 힘든 일이었단다.’ 미처 입 밖에 내지 못하고 꿀꺽 삼켰다. 명이 나물과 지성이 좋아하는 미역줄기 볶음, 오징어채 까지 지성은 연신 맛있다를 연발하며 한 그릇 뚝딱 식사를 마쳤다.

“맛있을 때 빨리 먹어 아끼다 똥 된다.”

그렇게 바리바리 싸간 식재료로 저녁마다 맛있는 한식을 해 먹였다. 그러다 정말 아끼다 똥 되는 일이 일어났다.

닭볶음탕을 만들었다.

셋 다 양이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지성은 다음날 한 번 더 그걸 먹고 싶었나 보다. 저녁을 먹고 무더운 날씨에 상하는 게 걱정돼 남은걸 데워 놓으려 냄비를 올리고 차 한 잔 마시며 딴짓을 하고 놀다가 다 태워먹었다. 인덕션이라 불꽃이 보이지 않은 것이다. 사람 셋이 냄비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 자기 부엌에서 냄비 안 닭볶음탕이 타는 줄도 모르고

“어느 집에서 맛있는 거 해 먹나 봐.”

라면서 메뉴를 궁금해했다.

바닥이 타버려 못 먹게 된 닭볶음탕을 보는 둘의 표정이 거의 나라 잃은 표정이다. 왜 안 그렇겠나 쉽게 먹을 수 없는 한국 음식, 그것도 극찬하며 먹었던 엄마 표 음식인데. ‘있을 때 더 먹지 그랬어.’ 그건 아마 우리 셋의 공통된 속마음이었을 것이다.

한국식 자재 전문 한인마트는 지성의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다. 지성은 한 달에 한두 번 그곳에 가서 한국 식재료를 구해온다. 소맥이 마시고 싶을 때나 독일 친구 방문에 대비해 소주를 구입하고 독일 마트에서 구하기 힘든 다른 식재료들을 구입한다. 마침 쌀이 떨어져 같이 가보기로 했다. 한인 마트 매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컸다. 구비된 상품도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고객은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외국인들의 비율도 꽤 많았다. 지성의 독일인 친구들만 봐도 한국음식 마니아가 꽤 있다.

지성이 독일에 오고 여러 번 택배를 보냈다. 코로나 탓에 더 비싸진 배송료에 할증까지 붙어 택배비가 물품의 값을 웃 넘을 때가 비일비재했다. 받는 쪽에서도 다시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한인 마트 와보고 깨달았다.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보내 놓고도 느려 터진 배송에 애태우느니 차라리 그 돈을 입금해주면 여기서 충분히 구할 수 있는 것이 태반이었다. 물론 가격이야 한국보다 비싸겠지만 배송료 생각하면 현지 구입이 훨씬 더 이득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지성은 김치가 먹고 싶으니 유튜브를 보고 직접 김치도 담가 먹는다. 부모는 자식이 다 커서 성인이 돼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지만 직접 겪어보니 이제 조금씩 마음을 내려놔도 될 것 같다.

‘아끼지 마라 아끼다 똥 된다. 그건 비단 음식 얘기만이 아니다. 삶의 많은 일이 그 이치와 같더라.’

딸에게 주고 싶은 인생 레시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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