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외로울까 봐 겁나
프라이부르크 여행 중 알테박헤 와인바에 들러 그 지역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트램에서 내려 프라이부르크 중심을 걸었다. 걷다 보니 바닥 곳곳에 다양한 길드 문장이 박혀있다. 이곳 프라이부르크는 친환경 녹색 도시이며 예부터 다양한 길드로도 유명한 도시다. 그것을 증명하듯 광장 앞에 대표적인 상인 조합 건물도 잘 보존돼 있다.
수로인 베헬레에 기대했던 물이 흐르지 않아 심심하긴 했지만 기사의 집과 대성당을 보고 와인바로 갔다. 와인바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여름에 해가 긴 독일은 밤 9시가 돼도 아직 낮처럼 환했다. 앉을자리가 없어 독일인들과 합석으로 원형 테이블에 선채 와인을 마셨다. 주변엔 와인뿐 아니라 바인 숄레, 와인 슬러시를 마시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있다 드디어 구석에 자리가 나자 얼른 거기로 옮겨 앉았다.
그건 두고두고 잘못된 선택이었고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는 경험을 하게 했다. 내내 마음에 돌 하나 얹어 놓은 듯 그때 일이 떠올라 지금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우리 옆 좌석엔 부부들로 보이는 중년의 남녀 6명이 와인 슬러시를 마시고 있었다. 몇 잔씩 연거푸 마시는 중이었고 취기가 돌면 그렇듯 목소리가 높아 안 그래도 시끄러운 야외가 더 시끄러웠다. 우리 역시 한참 재밌게 와인을 마시던 중 옆 좌석의 남자가 지갑을 떨어뜨렸다. 마침 나와 지성이 그것을 보았고 지성이 그걸 주워 부인인 듯한 옆자리 여성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자 그 여성이 그걸 남자에게 전해주며 말했다. 나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지성과 마크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저 아시아 여자애가 주워줬어.”
지성이 지갑을 건네며 분명 독일어로 말했다면 그들도 지성이 독일어를 한다는 걸 알 텐데 아무렇지 않게 아시아 여자애라고 말한 것이다. 지성의 얘기에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녀는 콕 집어 ‘아시아 여자애’라고 말했다. 만약 서양인 여자가 주워줬다면 그녀가 ‘저 서양인 여자애’라고 지칭했을까? 그건 그러니까 여직 내가 체험하지 못한 인종차별적 발언이었다. 그런데다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었다. 와인 슬러시 서너 잔 씩 마신 걸로 봐서 취해서라고 애써 합리화시켜봤지만 여전히 씁쓸한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마크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순간 마크는 본인이 미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지성이 독일에 사는 이상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겪으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처음 코로나가 시작됐을 때 독일에서 한국인 유학생 부부가 집단 린치를 당했다. 그때 지성은 독일로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독일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동양인 비하가 도를 넘고 있었다. 딸을 유학이 아닌 사지로 보내는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꿈꿔온 일이기에 주저앉힐 수도 없는 일이지만 스스로 포기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미 롱디 커플이었던 둘은 운 좋게 재회했고 다시 떨어지기 싫어 결혼을 선택했다. 기왕에 결혼을 할 거라면 그 상황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잘한 일이었다.
결혼을 결정하고 나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지성을 지켜줄 가족이 생겼으니 더군다나 마크는 자국민이 아닌가.
둘은 서로를 지극히 사랑한다. 신혼이기도 하지만 서로를 위한 배려가 남다르다. 대화도 많이 하는 듯하다.
내가 말없이 와인만 홀짝이자 내 기분을 눈치챈 지성이 위로하듯 말했다.
“엄마, 저 여자는 그래도 양호한 거야. ‘저 중국 여자애’ 혹은 ‘저 일본 여자애’라고 말하진 않았잖아. 최소한 저들이 아시아에 중국과 일본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잖아.”
지성의 말처럼 다른 나라에 나가보면 실제로 한국을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독일에서 살면서 딸이 어쩌면 숱하게 겪을 일 나는 그저 살짝 맛보기였는데도 그리 마음이 쓰였는데 지성은 앞으로 어떨까 생각하니 짠한 마음이 들어 더 속상했다. 그래도 좋다는데 뭘. 금방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대화하는 둘을 보니 그나마 조금 속이 풀렸다.
누가 말했는지 사랑엔 국경도 없다는 말. 내 딸이 그렇게 국경 없는 사랑을 하게 될지 미처 몰랐지만 어쩌랴 이미 패밀리 네임을 같이 쓰는 사이인 걸. 동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과 비하가 있을 지라도 마크와 지성인 지금처럼 서로 지켜주고 사랑하며 살 거라 믿기로 했다.
때로 이방인으로 사는 것에 너무 지치고 외로울까 봐 나는 그게 걱정되고 염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