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 가라사대(26)

한여름에 다시 보는 <닥터 지바고> - 모든 사랑은 혁명이다!

by 김혁

입추가 지나면서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는 하나 폭염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열대야 때문에 본의 아니게 밤마다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는 놀자는 어젯밤에도 자신의 뜨거운 몸을 자책하며 늦게까지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몸뚱어리 자체가 이렇게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여름마다 되풀이되는 연례행사였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 군대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을 때 유난히 운동신경이 둔한 자신의 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증오심을 느낀 이후, 그가 세상을 살면서 시시때때로 맞닥뜨려야만 하는 고달픈 실존적 자화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육체는 슬프다. 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어버렸다---.’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는 오래전에 이렇게 노래했는데, 고단한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사치스러운 얘기다. 늘 피곤에 절어 슬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으니까. 그런데 이거야말로 젊음을 되찾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 박사의 탄식이 아니던가. 모든 책을 다 읽었는데도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래서 남은 건 덧없는 육체뿐이라면, 그 육체는 정말로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진리가 어디 책 속에만 들어있다던가. 차라리 서러운 몸뚱어리를 통해서 깨달으면 진정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는 단연코 신 영복 선생을 들 수 있다. 고결한 양심수로 20여 년을 좁은 감방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면서 깨달은 삶과 세상에 대한 그 깊은 진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울림을 주었던가. 문득 선생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가장 가슴 짠한 부분이 생각났다. 무더운 여름에 비좁은 감방 안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자다 보면, 서로의 존재 자체가 지극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했는데, 그 얘기가 요즘 조금이나마 실감이 났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는 게 어디야?”

“암만! 이 극심한 불경기에 이것도 감지덕지지, 히히히!”

놀자는 애써 자신을 위로하며 히죽거렸다.

새벽녘에야 겨우 짧고 깊게 꿀잠을 자면서, 그는 오랜만에 SF 영화를 닮은 흥미진진한 꿈을 꾸었다. 그것도 아주 선명한 총천연색이었다. 아마도 최근에 재미있게 본 어떤 영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주 탐험대의 대장이 된 놀자는 부하들과 함께 우주선을 타고 광대한 공간을 한없이 날고 있었다. 눈앞으로 인간들이 과거에 망가뜨린 지구가 하나 둘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동안 1회용 플라스틱 제품처럼 쓰다 버린 지구의 숫자가 꽤나 많은 것 같았다.

“허허, 인간들이 저렇게 한심한 짓을 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놀자 대장은 씁쓸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뒤로하고,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앞으로 날아갔다. 탐험대의 목적은 현재 살고 있는 지구를 대체할 깨끗한 행성을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날아가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행성 하나가 보였다. 마치 한 송이 푸른 연꽃처럼 보였다.

“바로 저기다! 착륙하라!”

놀자 대장과 대원들은 드넓은 초원 위에 사뿐히 착륙한 뒤 밖으로 나왔다.

“와, 공기가 말할 수 없이 상쾌하고 싱그럽네요!”

“하늘도 무척 맑고 깨끗해요. 땅도 너무 비옥하고요!”

다들 감탄하며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 그리고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았다. 놀자는 즉시 부하들에게 정밀조사를 명령하였다.

“대장님! 이곳의 모든 조건이 지구와 똑같아요. 마치 쌍둥이 행성 같아요.”

“그리고 살고 있는 동물들과 식물들도 완전히 똑같아요. 딱 하나 인간만 없어요.”

“인간이란 존재가 없으니까, 행성이 이렇게 깨끗하고 평화롭고 아름답네요.”

“오, 낙원이여! 이게 바로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 그 자체로구나---!”

문명이 만들어 낸 인위적인 흔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순수 자연 그 자체를 처음 접한 놀자 대장은 엄청나게 엄습해 오는 경외감에 그만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잘 들어라! 우리는 지구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

“------?”

“앞으로 계속 여기서 살 것이다!”

놀자 대장은 대원들에게 단호하게 명령한 뒤, 타고 온 우주선을 폭파시켜 버렸다. 그러자 어리둥절해하던 대원들도 크게 환호하며 대장의 결단을 반겼다.

그날 이후, 놀자 대장과 대원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삶과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마침 여성 대원과 남성 대원의 숫자가 같아서 서로 짝을 지어 가정도 꾸렸다. 그들은 앞으로 이 행성을 진정한 낙원으로 만들겠다고 맹세했다. 전쟁과 정복과 학살로 점철된 인류의 역사를 절대로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고, 평화롭고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노라고 틈날 때마다 굳게 결심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문명의 이기도 없이 석기시대로 돌아가서 원시적인 생활을 하였다. 절대적인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함께 하고 함께 나누는 행복한 원시 공산사회였다. 모두가 한 가족 한 형제나 다름이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도 그 자체가 즐거운 놀이이자 축제인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었다. 대를 이어 줄줄이 태어난 후손들도 이런 전통을 중시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꾸어나갔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인구가 대규모로 늘어나자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철기시대가 시작되면서 각 지역별로 크고 작은 나라가 계속 생겨났고,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 간에 잔인한 다툼과 정복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고자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 노자 공자 마호메트를 꼭 닮은 성인들이 나타나서 가르침을 펼쳤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끔찍한 종교전쟁만 부추긴 꼴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는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여 문명이 엄청나게 발달하더니, 급기야는 약육강식을 기본으로 하는 제국주의가 나타나고, 결국 1차, 2차 세계대전까지 치르면서 근 현대 지구 역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판박이가 되풀이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라별로 하는 짓과 사람들이 사는 모습까지도 똑같았다. 특히나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과 흡사한 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여당과 야당이 사사건건 원수처럼 헐뜯고 욕하며 진흙탕 속의 개들처럼 싸우고 있었고, 대도시 골목 어느 건물 옥상에 있는 누추한 옥탑방에는 놀자와 똑같이 생긴 한 사내가 별반 하는 일도 없이 게으름을 잔뜩 피우며 살고 있었다.

그리고 기후변화와 온난화 때문에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2019년 겨울을 기점으로 해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행성으로 급속히 퍼졌고, 엄청난 혼란과 고통과 비용을 치른 끝에 겨우 진정이 되는 가 했더니,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나와서 설치는 바람에 행성 전체가 또다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중이었다---.


“허허, 이거 뭔가 새로운 버전이라도 나오나 했더니, 말짱 도루묵이로군.”

“그러고 보니까 니체가 말한 ‘영겁회귀’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란 말이지?”

“암만! 시시포스의 형벌이기도 하고. 인간들이 하는 짓이 늘 그렇지 뭐. 히히히!”

요란하게 귓전을 때리는 소낙비 소리에 잠이 깬 놀자는 꿈속의 일을 생각하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하고 있다. 이번에는 전파력이 훨씬 더 강한 델타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무대로 새로운 감염을 주도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들 백신만 개발되면 이 지긋지긋한 사태가 곧바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착각이었다. 백신을 맞아도 감염자가 계속 늘어나고, 돌파 감염까지 생기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미 우리와 함께 살려고 철저하고 치밀하게 준비를 하고 찾아온 불청객을 그냥 문 밖으로 쫓아내려고만 들었으니 먹힐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앞으로 더 센 놈들이 계속해서 나온다는데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이제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인류 문명 자체가 치명적인 질환이자 전염병이라는 바로 그 사실을! 그리고 겸허하게 선고해야 한다. 인류 문명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파산선고를!

그동안 인류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문명을 가꾸고 발전시켜 온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하지만 그건 너무 일방적이고 순진한 생각이었다. 이제와 돌이켜 보니 그건 자연계를 위해서나 인간 자신을 위해서나 일종의 재앙이자 질병이었다. 영원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이 따로 없었다. 이러한 반성과 인식하에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코로나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울 것 같다. 일단은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굳세게 버티며 살아남는 각자도생이 중요하다.


각자도생! 그거라면 놀자도 자신이 있었다.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가진 게 하나도 없어서 오히려 누구보다 유리한 입장이었다.

놀자는 오래전부터 여름에는 <닥터 지바고> 영화를 몇 번 되풀이해 보면서 더위를 달래고, 겨울에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영화를 몇 번 되풀이해 보면서 추위를 달래는 불문율이 있었다.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안해 낸 정신승리 냉난방 비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딸깍발이 흉내를 내는 무명시인의 자존심을 약간 만족시켜주는 것 말고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이 불문율을 잊지 않고 즐겼다.

금년 여름에도 놀자는 <닥터 지바고>를 두어 번 되풀이해 보면서 무더위를 잊으려고 애를 썼다. 이 영화는 역시 여름에 봐야 제 맛이었다. 그리고 전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점들이 생각나서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그 어리고 청순한 라라가 늙고 음흉한 호색한 코마로프스키에게 수년간이나 능욕을 당한 끝에 분노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총을 쏜 때가, 대충 안 중근 의사가 우리나라를 빼앗기 위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본 원로정객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때와 비슷하네?”

“맞아. 러일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으니까, 아마도 그럴 거야.”

“그 당시 러시아 제국도 극동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많은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 일본과 맞붙어서 왕창 깨지고 말았지.”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 놈들의 칼에 시해당한 후, 겁에 질린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도 그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었고.”

“영화에서 아내 토냐는 구체제 지배계급을 의미하고, 연인 라라는 신흥 민중 계급을 대변하지. 그리고 라라가 쏜 총성은 곧 러시아 전역에 울려 퍼질 혁명의 신호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 안 중근 의사의 총성은 비록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는 했지만, 결국 일제의 치밀한 침탈 야욕을 막아내지 못했지. 치욕스럽게도 그 이듬해에 바로 한일합방이 되고 말았으니까.”

“아무튼 그런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숭고함을 잃지 않고 운명적인 사랑을 꽃피우다 스러진 지바고와 라라의 사랑은 정말 대단해.”

“맞아. 모든 사랑은 다 혁명이라는 사실을 지바고와 라라는 우리에게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그 당시 우리는 너무나도 국제정세에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생활수준도 몹시 낙후되어서, 그토록 대단한 사랑 하나 가지지 못한 게 한스럽고 안타까워.”

“뛰어난 의사이자 탁월한 시인인 지바고는 결국 토냐와 라라 둘 다 잃고, 혁명이 완수된 모스크바 거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는데, 그건 바로 혁명의 실패를 암시하지.”

“그리고 혁명 기간 동안 벌어진 엄청난 살육과 방화와 파괴는 혁명 자체의 한계와 모순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혁명 이후에 벌어질 미래상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지.”

“반쪽짜리 혁명이라서 그래. 러시아 혁명은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불량품이자 모순투성이였으니까. 우리가 지금 남북으로 분단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인류 역사에 완전한 혁명이란 없어. 그래서 혁명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조금씩 부족한 것을 보완하고 발전해 나가야 하는데, 그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교활하고 사악한 사업가이자 변호사인 코마로프스키 같은 부류의 인간이 결국 먼 훗날 도래할 본격적인 자본주의 세상의 주인공이 될 거라는 예상도 해 볼 수 있어.”

“맞아. 정말로 속상하고 씁쓸하지만, 그런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

“이제 거대한 정치적 혁명의 시대는 끝났고, 미국 시인 로버트 푸르스트가 말한 대로 각자가 깨어있는 1인 혁명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맞아. 그래서 내가 옥탑방에서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아무도 알아주질 않네.”

“조금만 기다려봐. 곧 혁명의 열기가 저 광야의 들불처럼 번져갈 테니까,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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