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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코 Dec 14. 2022

껌딱지 남편


내가 무뚝뚝한 성격이라 애교 많은 남편한테 끌린 건지 모르겠다. 남편은 본인이 필요할 때는 엄청 귀여운 편인데 오랜 경험으로 '얘가 뭔가 원하는 게 있구나'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시어머니와 나는 꼼짝없이 당하는 편이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세상 과묵하지만 나와 시어머니, 그리고 그의 베프에겐 엄청 수다스럽다. 한번씩 그의 말이 터지는 날에는 귀에서 피가 날 것 같은 때도 있다. 나와 시어머니의 필살기는 한쪽 귀로 듣고 흘리기. 중간에 듣고 있는지 검사하는 그 때문에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만 사실 듣는척 하면서 흘리는 날이 많다. (남편 미안)


'나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뭔가 하는 걸 좋아하는 그는 좋게 말하면 다정하고 좀 안좋게 말하면 껌딱지가 따로없다. 프랑스에 오면서 학생이 된 그는 집에서 온라인으로 코딩 수업을 들으며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집에서 고양이들이랑만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내가 퇴근하면 껌딱지가 된다. 사실 한국에서 회사 다닐 때도 그런 경향이 있긴 했다.


퇴근하고 소파에 앉아있으면 바짝 옆에 붙어 앉아서 수다를 떠는 그. 한 가지에 꽂히면 몇 날 며칠이고 같은 주제를 되새김질하는 재주가 있어서 내가 금지한 주제도 몇 가지 있는데, 누가 프랑스인 아니랄까 봐 요즘엔 월드컵에 꽂혔다. 프랑스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고 재방송을 보고 전력 분석하는 방송을 보고 스포츠 채널에서 또다시 불러보면서 나한테 선수들의 특징이나 감독의 전술, 그리고 상대팀 분석을 해주는데 우리나라가 16강 올라간 이후로 전혀 관심이 없는 내 귀에 그의 이야기가 들어올 턱이 없다.



남편이 거실에서 축구 보면서 소리 지를 때 정신이 상그러워 침실로 대피해서 고양이들이랑 놀고 있으면 왜 자기만 따돌리냐고 찡찡거리는 그. 가능하면 본인은 재미가 없어도 내가 친구들이랑 놀러 나가면 어지간하면 따라 나선다. 이렇게 나랑 함께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하는 그에게도 불가항력이 있으니 바로 비행기.


비행기를 타야될 일이 생기면 너무 무서워서 한 달 전부터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한다. 프랑스로 넘어올 때도 너무 스트레스받아서 수면제를 처방받아 왔을 정도. 올 연말에 한국에 비자 연장하러 가야해서 티켓을 몇 달 전부터 사두었는데 출국을 2주 앞두고 도저히 무서워서 못 가겠다며 두 손을 들었다.


"그럼 나 혼자 갔다 올게!"       


'어떻게 자기만 혼자 두고 한국에 갈 수가 있느냐, 혼자 비행기 타면 걱정돼서 너무 불안할 것 같다. 같이 남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놀러 가면 안 되겠냐'라고 노래를 부르는 그를 차분하게 달래 보았다. '해외로 출장을 갈 수도 있고, 네가 비행기 못 탄다고 나도 한국 본가에 안 갈 수는 없는 일인데 그때마다 이렇게 찡찡거릴거냐. 그만 적응해.'


무심한 와이프를 둔 그는 오늘도 입이 댓 발 나왔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좀 이기적인 부탁이었던지 결국은 미안하다고 했다. 이정도면 상담을 받아봐야 할것 같아서 새해가 되면 상담사를 찾아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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