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휴가
보통 주재원들에겐 적어도 일 년에 한 번 본국으로 돌아갔다 올 수 있는 항공권이 제공된다. 솔직히 나는 오지도 아니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유럽, 그중에서도 프랑스(시골이긴 하지만)로 파견 와서 일하는 지라 항공권 좋긴 한데 쓸 일이 있겠나 싶었다. 남편 가족들도 여기 있고 몇 년 만에 나온 유럽이니 옆동네 구경이나 실컷 하다 가야지 뭐 이런 생각도 있었고.
8개월이 지나니 그동안 적응하느라 바빠서 미처 살피지 못했던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어 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씩 듣고 있고, 회사에서는 내내 프랑스어가 들리는데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회사에서는 업무 특성상 테크니컬 한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들어도 들어도 기억이 안 나고 동료들이랑 커피 챗을 할 때는 천천히 말하면 좀 알아듣지만 대부분은 대체 뭔 소린가 싶다. 어제는 크리스마스 휴가 대비 프랑스어 수업 보강을 하느라 2시간 동안 수업을 했는데, 하필 주제도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라 선생님이 하는 말이 대체 무슨 소린지 몰라서 거의 흘려들은 것 같다.
"아 답답해"
내가 영어인들 원어민처럼 유창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의사소통에는 별 무리가 없는데 (당연히 한국어를 사용할 때보다는 답답) 프랑스어는 이해도 안 되고 내 생각도 잘 전달이 안되니 환장할 지경. 내가 말하는 건 사전 찾아가며 구글 번역기 돌려가며 어찌어찌하는데 상대방 말이 이해가 안 되는 게 더 문제다.
남편한테 집에서도 이제 영어보다는 프랑스어랑 한국어를 중심으로 대화하자고 해야겠다. 영어는 나도 남편도 원어민이 아니니 미세한 감정을 전달하는데 문제가 있고 (그래서 다른 커플들 보다는 훨씬 덜 싸우지만) 이제는 그의 한국어와 나의 프랑스어 증진을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때. 우리 회사에는 글로벌 기업 특성상 국제 커플이 상당히 많은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둘 중 하나의 모국어로 대화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 중론.
일단 휴가 기간에는 영어고 프랑스어고 집어치우고 한국 돌아가면 가족들이랑 친구들이랑 수다나 실컷 떨다 와야겠다. 일주일은 너무 짧은 시간이라 병원 투어만 하다가 돌아올 것 같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