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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꾸 Nov 24. 2021

Minnesota

팀버울브즈와 뮤지션 프린스


  

미국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시들이 많다. 라라랜드를 보며 LA가 떠올리고, 사막과 카지노를 떠올리게 하는 LAS VEGAS도 있다. 샌프란시스코며, 시애틀이며, 뉴욕, 마이애미, 애틀란타 등 가보진 않았더라도 그 도시가 주는 느낌과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온 이미지로 기억할 것이다. 뉴욕하면 자유의여신상이 떠오르고, 샌프란시스코는 금문교, 시애틀하면 스타벅스 등 여러가지로 기억되지만, 미네소타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흔히 미네소타는 한국인 야구선수 박병호가 뛰었던 미네소타 트윈스라는 MLB팀을 기억하거나, NBA의 미네소타 팀버울브즈 정도는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미네소타는 캐나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한반도보다 약간 큰 크기를 가진 미국 중북부의 주이다.


 가장 번화한 지역은 트윈 시티다. 미네소타 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미니애폴리스와 주도인 세인트 폴 및 이를 둘러싼 지역을 엮은 것이다. 별명은 지역 주민들이 부르는 Twin Cities. 주의 인구 절반 이상이 이 지역에 모여 사는데, 미네소타 트윈스라는 팀의 이름도 트윈시티 라는데에서 출발했다. 백인 비율이 90프로 가까이 되는 곳이고, 북유럽의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이주한 백인들의 비율이 다른 주보다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조용하고, 강추위와 폭설 그리고 1만개의 호수를 가지고 있는 다른 미국의 주들보다 한적하면서 조용한 곳이다.



1. 동네북 미네소타 팀버울브즈와 케빈 가넷


 중학교 시절 내 또래 친구들은 모두 농구에 심취해 있었다. 지금은 방송인으로 활약하는 서장훈, 현주엽, 우지원, 허재 선수가 농구선수로 큰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빅히트를 하고, 농구대잔치에 연고전이 드라마 시철율을 뛰어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였다. 학교 생활을 제하고 어린 내 인생의 모든 것은 농구였다. 쉬는 시간마다 달려가 10분도 안되는 시간 동안 림을 향해 슛을 날렸고, 학교 끝나고는 친구들과 동아리를 만들어 게임을 하고, 집에 와사도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농구골대를 향해 수없이 슛을 날리곤했다. 미군부대 근처에 집이 있었던 탓에 난 흑인병사들의 NBA져지를 입고 농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고, 리그를 통틀어 덩크슛을 한두번 볼까말까한 국내리그와 달리 한쿼터에도 4,5번의 호쾌한 덩크슛을 볼 수 있었단 NBA의 선수들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친구들 대부분은 마이클 조던의 팬이었다. 월등한 기량과 실력으로 리그 우승부터 득정왕, 덩크 컨테스트 우승 등 마이클 조던은 농구의 신이라 불리던 레전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난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를 응원하지 않았다. 워낙에 강팀인데다 모든 팀들을 박살내며 연승행진을 펼치는 팀에게 나의 조그만 응원은 필요 없어 보였다. 오히려 연전연패를 거듭하는 팀에게 관심이 갔다. 우승과는 거리가 먼 팀. 일승을 하거나 2연승을 하면 우승한것과 같은 느낌을 받던 팀이 바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즈였다. 당시 어린 나는 미네소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곳인지도 몰랐지만, 막연하게나마 뉴욕과 LA같은 대도시는 아닐거라 생각하며 소위 언더독의 반란을 꿈꾸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엄밀히 따지면 나의 미네소타 응원은 95년 중학교 3학년때이거나, 고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한다. 필립 손더스가 감독으로 있었고, 당시 고졸 출신 케빈 가넷을 드레프트했다. 가넷을 중심으로 미네소타는 리빌딩에 들어갔고, 내가 응원하던 시기 그들은 서부 컨퍼런스의 강호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96/97시즌 첫번째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고, 이때부터 8시즌 연속으로 그들은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의 위업을 이룬다. 하지만, 7시즌은 모두 1라운드에서 탈락을 하고 만다.  가넷 원맨의 활약으로 파이널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웠고, 은근히 연봉 또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때문에 돈이 시장을 지배하는 것처럼 스포츠에서도 가난한 구단의 우승은 기적이 아닌 이상 힘들었다. 그 와중에 이면계약 사건도 터지면서 5년간 1라운드 지명권을 박탈당하며 새로운 선수 수급이 힘들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라트렐 스프리웰과 샘 카셀을 영입하며 03/04시즌에는 지구 우승과 함께 플레이오프에서도 1라운드를 통과하며 서부 컨퍼런스 결승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우리가 잘아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LA 레이커스에게 패하며 우승도전에는 실패했다. 이후 우승에 목말랐던 케빈 가넷이 보스턴으로 떠나며 팀버울브즈는 다시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선수들의 잦은 부상과 팀 전력 이탈, 어수선한 분위기와, 감독과의 불화 등 잘안되는 스포츠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팀이 바로 미네소타 팀버울브즈이다. 승리보다는 패가 많고, 우승권에 도전하기 보다는 내년에 팀을 가다듬어 조금더 좋은 성적을 내고자 노력하는 팀이 바로 미네소타 팀버울부즈였다.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가능성은 있는데, 최상위 단계로 도약하지 못하는 그저그런 모습이 꼭 내 모습 같았다. 특별히 못하는 것도 없었지만,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잘하는 누군가의 빛나는 모습뒤 그림자에 가려 조용히 퇴장하는 모습이 내 모습 같아 나도 모르게 난 지금까지도 팀버울브즈를 응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우승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는 팀인 팀버울브즈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살기 쉽지 않을 것 같은 나의 인생이 묘하게 오버랩 되는 듯했다. 기대와 실망의 반복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한 밑거름이 될 거라 믿기에 팀버울브즈도 나의 인생도 그렇게 묵묵히 견디며 응원하는 것이다.


빅 티켓이라 불리던 케빈가넷이 떠나고 팀버울브즈는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지금도 그렇다. 13시즌 앤서니 베넷, 14시즌 앤드류 위긴스, 15시즌 칼-앤서니 타운스까지 3년 연속 1번 픽 선수를 뽑았으나, 그들의 활약은 우승에 도전하기엔 힘든정도였고, 여전이 우승은 커녕 플레이오프 진출도 힘든 팀이 되었다. 그런 팀버울브즈가 플레이오프에 도전해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시즌이 있었으니 바로, 17/18시즌이다.




 난 이 시즌을 잊을 수 가 없다. 내가 직접 미네소타로 날가아 플레이오프를 봤던 것도 그렇고,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게 된 그들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며 나도 잘 할 수 있다는 위로를 느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잊을 수 가 없다. 잭 라빈과 크리스 던을 내주고 지비 버틀러가 미네소타에 합류하게 된다. 자말 크로포드와 타지 깁슨 등 시카고 시절부터 톰 티보도 감독과 함께했던 선수들을 영입하며 프렌차이즈 사상 최강의 라인업을 구축하는 성공하며 기대감을 높였다. 시즌이 거의 절반 정도 지났을 무렵 5할 중반대의 승률을 기록하며 서부 4위정도의 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8위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 할 수 있었기에 4위라면 평소의 팀버울브즈와 비교해본다면 엄청난 성장이었다. 하지만, 감독이 주전 선수들이 40분 넘는 플레이 타임을 소화하며 체력적인 부분을 걱정스럽게 했다. 젊은 팀이었기에 체력적인 부분이 시즌 중반까지는 어찌어찌 버텨냈지만, 후반으로 갈 수록 팀은 성적은 들쑥날쑥했다. 4월로 기억하는데 멤피스와 덴버와의 경기를 남겨 놓은 상황이었다. 여전히 5위와는 1경기 차였지만, 5연승 중인 덴버와 승차없이 8위였기 때문에 약팀 멤피스와의 경기에 무조건 승리하고, 덴버가 포틀랜드에 져야하는 상황이었다. 미네소타는 멤피스를 잡았고, 덴버 또한 포틀랜드를 잡았고, 승차없이 8위를 유지했다. 결국 4월 11일 남은 플레이오프 진출권 1장을 놓고 덴버와 미네소타는 단두대 매치를 하게 된다. 승리할 경우 6위로 플레이오프에 올라가는 것이고 지면 플레이오프에 탈락하는 것이다. 연장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미네소타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고, 난 내가 무언가를 해냈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들의 플레이오프를 직접가서 응원하고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이 일본처럼 가까운 나라도 아니고, 당시 아기가 태어난 상황에서 갓난 아이와 조리중인 아내를 두고 농구를 보러 미국에 간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아내의 허락이 떨어졌고, 물론 1라운드에 떨어지긴 했지만,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거둔 승리 게임을 직접 타겟 센터에서 관람했다는 부분에서 아직까지도 당시 그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언더독이란, 스포츠에서 우승이나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 ‘언더독 효과’는 경쟁에서 열세에 있는 약자를 더 응원하고 지지하는 심리 현상을 뜻하는 용어로, 정치·스포츠·문화·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 나타난다. 『아웃라이어』의 저자로 유명한 맬컴 글래드웰은 최근에 펴낸 다른 저서 『다윗과 골리앗』에서 기존의 관념에서 발상의 전환을 시도했다. 그에 따르면, 상황적으로 볼 때 절대적으로 불리한 약자로 볼 수밖에 없던 다윗이 싸움의 틀을 바꾸면서 유리한 싸움을 전개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의 강자였던 골리앗은 몸집이 큰 대신 느리고 눈까지 침침해 발 빠르고 돌팔매에 능했던 다윗에겐 오히려 맞히기 좋은 표적에 불과했던 것이다. 맬컴은 이 같은 교훈을 빌어 언더독이 승리했던 비결을 그의 저서에서 분석했다. 이런 면에서 나는 이 땅의 수많은 언더독들도 자신의 불리한 현재의 조건이나 상황에 낙담하기 보다는 꾸준한 동기부여와 더불어 자신의 약점도 뒤집어 놓고 보는 데서 성공의 동력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성공이 쉽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승리 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동기부여하고, 약점을 보완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2. purple rain


미네소타에서 태어나고 미네소타에사 자라고 미네소타에서 눈감은 천재 뮤지션 프린스를 말해보고싶다. 미국의 전설적인 뮤지션이자, 미국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위해하고 영향력 있는 아티스트 중 한명이다. 아마 마이클 잭은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도, 프린스를 모르는 사람은 대부분일 것이다. 특히 한국에선 그의 음악을 아는 사람이 생각보다 꽤 많음에 놀랐다. 그는 롤링 스톤지가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뮤지션 27위에 오른 아티스트이자, 네오 소울과 얼터너티브 R&B의 시발점이 된 뮤지션이다. 마돈나, 마이클 잭슨과 함께 80년대 팝의 중흥기를 이끌었으나, 지나치게 자유로운 음악성향에 의해 그의 음반이 국내에 정식수입 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전자의 두명에 비해 인지도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둘에 못지않는 전설로 손꼽힌다.음악가 부모님아래에서 7세부터 작곡을 시작한 그는 탁월한 기타실력, 수많은 악기를 소화할 뿐 아니라, 작사, 작곡, 편곡에 이르기까지 전부 혼자 할 수 있는 천재 아티스트였다.  독학으로 악기연주를 익혀 30가지 이상의 악기를 프로급으로 소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니 놀라울따름이다. 기타실력으로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된 그 유명한 제프 벡이 흠잡을 데 없는 기타리스트로 극찬하기도 했다. 스티브 바이는 악기를 연주함으로써 자신의 영혼까지 드러낼 줄 아는 수준의 연주자 중 한명이 프린스라고 말했을 정도다. 기타에 있어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는데, 기타 히어로라는 게임이 있다. 이 게임사에서 기타 히어로 프린스 버젼을 내기 위해 프린스에게 제의를 했지만, 아이들이 게임이 아닌 실제 기타를 배워야 한다는 믿음이 있어서 제안을 거절했던 일화는 그의 기다에 대한 철학과 자부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노골적인 퍼포먼스와 기행으로 무장한 팝스타의 가면을 쓴 기타리스트에게 대중들은 평가를 꺼렸지만, 롤링 스톤즈지에서는 그를 저평가된 기타리스트 1위로 평가한 적도 있다.




그렇다면 프린스는 기타리스트인가? 아니다. 그의 음악은 팝과 ROCK, 재즈와 블루스, 일렉과 신스가 혼합된 뭐라고 한지로 규정 할 수 없는 뮤지션이다. 스티비 원더는 그를 일컬어 어떤 음악도 커버 할 수 있는 뮤지션이라고 할 정도 였다. 다재다능했던 그는 다른 장르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고, 실제로도 다양한 악기와 장르를 그의 앨범에 녹여냈다. 이를 자신이 개척한 장르인 미니애폴리스 사운드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작곡이면 작곡, 작사면 작사, 심지어는 편곡에, 프로듀싱, 연주까지 혼자 한 1978년 데뷔 앨범 FOR YOU는 지금들어도 소름끼칠 정도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 그의 나이가 19세 였다는 것이다. 신해철 형님은 라디오에서 그를 20세기에 태어난 흑인 모차르트라고 말한저기 있다. 딱 그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최고의 히트작은 1984년 'Purple Rain'이다. 직접 주연한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으로 음반은 빌보드 앨범차트 24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미국에서만 1300만장이 팔렸다. 일변의 반 이상을 1위를 차지했다는 소리다. 엄청난 인기였음을 알 수 있다. 84년이면 난 아주 꼬꼬마였기에 당시의 인기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집에 있던 보라색 LP음반을 수없이 들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대충 알 수 있었다. 내가 프린스에 빠지게 된 계기도 이 LP 한장 덕분이었다. 이 음반에서 9분이 넘는 대곡 'Purple Rain', 'Let's Go Crazy', 'When Doves Cry', 'I Would Die 4 U' 등이 싱글차트를 휩쓸었고, 이어서 바로 다음해 'Around The World In A Day' 음반으로 차트를 점령했다. 이 시절이 프린스의 최고 전성기라 할 수 있겠다. 이 시기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정식으로 음반이 발매되어, 마이클 잭슨의 라이벌로 여겨지면서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처음엔 단순히 댄스가수로 오인되었지만, 곧 그가 싱어송라이터이자 대단한 기타리스트 라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듯 팝뮤직계의 슈퍼스타로 부상했지만, 음반사와의 갈등으로 1990년대에는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했다. 프린스가 기행의 상징이 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이 소속사와의 기나긴 분쟁인데, 프린스의 창작 욕구와 재능은 다른 뮤지션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숫자의 곡을 만들게 했고 프린스는 이 음악들을 엮어서 꾸준히 앨범으로 발매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소속사는 앨범의 희소성, 판매량등을 고려해 2년에 한 번 정도 발표하기를 원했다. 열받은 프린스는 '그럼 prince 명의로만 안 내면 되겠네 알겠어.'라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수 년동안 법정소송을 벌였다. 실제로 1996년에 공개된 앨범의 수록곡인 Face Down으로 이때 갈등을 벌인 Warner Bros. Records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한 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뮤지션이 자신의 음악을 통해서 얻는 수익을 포함한 권리가 적다는 항의를 늘 해왔다. 음반사와의 분쟁으로 암흑기를 거치며 대중들은 점점 그를 잊어가는 듯 했지만, 2004년 'Musicology'를 내놓으며 빌보드 앨범차트 3위와 더블 플래티넘 획득 그리고 그래미 어워드를 석권(2개 부문 수상)했으며 그해 가장 많은 공연 수익을 올린 아티스트가 되는 등 완벽하게 부활했다.





I never meant to cause you any sorrow

조금도 당신을 슬프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I never meant to cause you any pain

당신께 어떤 고통도 주려는게 아니었어요


I only wanted one time to see you laughing

그저 한번은 당신의 웃는 모습을 보고싶을 뿐이었어요


I only wanted to see you laughing in the purple rain

그래요 보라비 속에서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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