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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꾸 Aug 17. 2021

8일 차> 과거의 LP가 너에게

Ahmad Jamal - I'll never stop loving you


 언제부턴가 LP가 눈에 많이 띈다. 회현역 지하상가에 자리 잡고 있던 LP매장에 사람들이 붐비고 을지로와, 종로 3가 후미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LP샵에도 사람들이 붐빈다. 재미있는 것은 젊은이들의 방문이 잦다는 것이다. 40을 넘긴 나이다 보니 이제는 젊은이 측에 끼지 못한다는 것이 갑자기 조금 서운하긴 하지만, 20~30대 친구들이 손님의 절반이 넘을 정도라니 젊은 층에서의 인기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대도 더러 있다고  할 정도이니 젊은 층에서의 LP가 인기는 인기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신문 기사에서 종종 LP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말도 자주 들려온다. 이런 흐름은 국내에 한정되지 않는데, 빌보드와 음판 판매량 조사회사 MRC의 데어터에 따르면 작년 LP 판매량은 전년대비 30% 이상 늘었다고 한다. 1986년 이후 최초로 CD 판매량을 앞질렀고, 매출액은 한화로 7000억이 넘는다고 한다. 젊은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LP를 구매하는 걸까 국내 음반 판매 사이트의 조사를 살펴봤더니 30대가 31%, 20대가 21%로 둘을 합쳐 50%를 넘었다. 턴테이블로 직접적으로 LP를 들어본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감성의 소비의 소재로써 LP를 구매하고 있는 것 같다. 흐릿한 필름 카메라에서 그것만의 감성이 있듯, LP도 지지직 거리는 소리가 주는 감성을 좋아하는 것 같다. LP(longplaying record)는 기성세대에게 ‘LP판’, ‘빽판’ 등으로 불리지만 MZ세대에겐 ‘바이닐’이란 용어가 좀 더 익숙하다. 절대적인 룰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힙하다는 말로 대변되는 젊은 친구들의 감성과 문화를 상징하는 언어로는 LP보다는 바이닐만큼 적당한 단어도 없는 듯하다. 경험해보지 않은 복고와 향수의 사이를 벗어나 젊은 세대만의 어휘와 문법이 바이닐 문화에 녹아 있는 셈이다. 과거에는 10곡 이상 담을 수 있는 지름 12인치짜리 LP판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 출시된 바이닐들은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수록곡이 한두 개뿐인 7인치 바이닐도 많고, 곡 수가 4개 미만인 음반도 많아졌다. 수록곡이나 곡의 수와 상관없이 LP자체가 하나의 굿즈로 자리 잡은 느낌이다.



 회현역으로 콜을 잡고 가서는 더위도 식힐 겸, 예전 기억도 상기시킬 겸 지하 LP상가로 향했다. 지하라 시원한 바람이 공간을 가득 채웠고, 매장이 가까워오자 오래된 서점 특유의 향기가 풍겨왔다. 습한 장마철 날씨 덕분에 그 향기는 먼발치까지 날아왔고, 어렵지 않게 LP샵을 찾을 수 있었다. 조그마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LP가 가득 담긴 박스 안에서 LP를 찾아보는 재미가 있던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지만, LP가 주는 특유의 그 느낌은 여전했다. 우리 집에는 싸구려 LP플레이어가 있었다. 지금은 버리고 없다. 실제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기에, 노후화된 플레이어를 버렸다. 공간은 핑계고 사실은 LP를 들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조용히 위스키 한잔을 따라 담배 한 개비를 피며 편한 의자에 반쯤 드러누워 듣는 LP 속 음악은 여유다. 가만히 앉아 위스키를 홀짝이며 듣는 내가 좋아하는 EARTH WIND & FIRE, AHMAD JAMAL, PAUL DEMOND, CHICK COREA의 앨범을 듣고 있다 보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오롯이 나와 음악에 집중하는 시간만큼은 세상의 고민과 걱정은 스피커 너머로 날아가버린다. 신나는 곡이건 조용한 노래이건 상관없이 그렇게 나에게 안식과 휴식을 주었다. 어느 순간 오지 않게 된 회현역 LP매장처럼 LP에는 먼지만 쌓이게 되었고, 시간적 공간적 여유가 없던 나는 핸드폰에 저장해 두고 무선 이어폰을 통해 잠깐잠깐 음악을 듣는 지경에 이르렀다. 30분 전 내가 들었던 노래가 무엇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음악은 나에게 더 이상 여유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저 내 삶의 작은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내 삶 전반에 크나큰 배경처럼 깔리던 음악은 언제부턴가 사치로 느껴졌다. 세상 좋게 드러누워 LP판을 뒤집어 갈아 끼우며 음악에 집중하던 좋은 시절은 이제 없다. 30분도 그렇게 오롯이 음악에 집중할 시간조차 없는 셈이다. 한때는 음악이 내 모든 것이었는데 이제는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열심히 LP를 고르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내가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앉아 있는 듯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불편했다. 고향에 온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아니라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 뻘쭘하게 매장 앞에 서서 쭈뼛거릴 뿐이었다. 어떤 앨범들이 있을까 궁금했던 마음도 단번에 사라져 버렸다. 쫓기든 지하상가를 벗어나 남대문 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예전에 LP를 들을 때는 심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결혼 전이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모든 면에서 여유로웠다. 자기 전에는 내일 뭘 하고 놀지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그랬던 내 삶에 음악이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흑백의 내레이션만 가득한 심심한 영화보다는 칼라풀하며, 씬의 느낌과 어울리는 영화음악들이 배경으로 깔리며 전개되는 스펙터클한 영화 같은 느낌의 인생이었다. 강원도 양양으로 캠핑을 떠나 바다 앞에 캠핑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 맥주 한잔과 함께 즐기는 휴대용 LP플레이어 위에서 흐르던 GERRY MULLIGAN의 음악들. 신나게 서핑을 하고는 그늘에 앉아 시원한 얼음과 함께 즐기는 콜라 한잔과 QUEEN의 음악들. 친구들과 삼겹살 시골집 앞마당에서 볼륨을 크게 키워놓고는 소주파티를 하면서 듣던 AC/DC의 음악들과 유유히 바다를 가르는 요트 위에서 듣던 SARAH VAUGHAN의 음악들까지 장면보다도 멜로디와 음악이 나에게 주던 느낌까지 하나하나 기억이 난다. 음악은 단순히 당시 상황을 극대화해주는 배경의 역할이 아니었다. 캠핑을 하고, 서핑을 하고, 친구들과 놀던 장면이 기억되기보다는 그 음악이 주던 분위기와 느낌이 멜로디로 나에게 남아있다. 그 음악을 들으며 그때  그렇게 내가 느꼈던 좋은 느낌이 떠오른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먼 예전 느낌처럼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이제는 엄청나게 멀어진 느낌이다. 예전과 다르게 확실히 여유가 사라진 느낌이다. 모든 면에서 사라진 여유는 이제는 각박한 느낌이 더 익숙하다. 오히려 편안하면 불안한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여유롭게 무언가를 즐기려다 보면 내가 이렇게 여유로워도 되는걸 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제대로 그 시간을 보내기 힘든 지경이다. 어쩌다 이렇게 난 메말라 버리게 된 걸까. 먼지 가득하게 쌓여있는 LP판들을 보며 내 처지가 딱 저런 모습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LP판. 그 위에 소복이 쌓여있는 먼지들.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조금만 격하게 만져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앨범 표지들. 안쓰러울 지경이다.





 밤 12시가 넘게 운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곧장 작은 방으로 향했다. 청소도 잘하지 않는 작은 방은 기억 속 가물가물한 물건들을 찾을 때를 제외하고는 잘 열지도 않는 방이다. 역시나 책장 구석에 LP들은 쌓여있었고, 케케묵은 먼지들과 함께 특유의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한 장 한 장을 꺼내 수건으로 닦았다. 한 장의 앨범을 닦을 때마다 구매 당시 또는 그 음악을 들었을 때의 추억들이 마구 떠올랐다. 이  앨범은 입사 1년 차 때 구매했던 앨범이고, 이 앨범은 대학교 4학년 때 종로에서 어렵게 구매한 앨범이었다. 이 앨범은 분당에서 혼자 살 때 반지하 방이긴 했지만 나만의 공간에서 주말에 자주 듣던 앨범이었고, 이 앨범은 캠핑 가서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산에서 자주 들었던 앨범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소중한 추억들이다. 하나하나가 그렇지 않은 것들이 없었다. 추억을 너무 경시했다. 중요한 것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라고 생각하며 과거를 너무 무시했다. 그렇게 현재에 집착하며 살아왔더니 과거는 잊혔고 미래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그렇다고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희망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 상황이 되었다. 난 여태 무얼 하며 살아왔는가 그리고 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확실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만은 뚜렷이 남게 되었다.  LP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았던 추억으로 남고 충만했던 현재의 기억을 바탕으로 뚜렷한 미래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잠시 잊혔지만, 다시금 과거로의 여행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그려주고 있는 지금의 바이닐처럼 살고 싶어 졌다. 그대로 잊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 장 한 장 LP를 꺼내 먼지를 닦아내며 추억을 잊고 여유 없이 살고 있는 나 자신의 그릇된 생각들도 닦아냈다. 조심스럽게 꺼내서 닦은 다음 다시 앨범 포장 속으로 집어넣었다. 즐겁고 여유로웠던 추억도 추억이지만, 지금의 기억들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봤을 때는 추억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거의 나도 나고, 지금의 나도 나다. 지금의 불편함과 고민 걱정들이 미래에서 지캬봤을 때는 재미난 에피소드들, 추억거리가 될 수 있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다시 LP들을 사 모으려 한다. 그리고 음악도 자주 들으려 한다. 나름의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아무런 배경도 없이 지나가지 않게 열심히 추억을 아로새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Ahmad Jamal - I'll never stop loving you을 들으며  차곡차곡 LP들을 정리했다. 곡 제목처럼 멈추지 말고 사랑해야겠다. 그게 내 과거이건 현재이건 미래 건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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