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들음으로써 생기고, 후회는 말함으로써 생긴다
얼마 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자폐 증상을 가진 주인공이 성인이 되어 벌어지는 일들을 녹여내며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7살이 된 우리 딸도 4살이었을 때 자폐가 의심된다는 병원의 진단 결과를 받은적이 있다. 진단을 받고는 자폐증이라고 불리는 이 병에 대해 나름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우리 딸은 자폐와는 거리가 먼 엄청나게 수다스럽고 활발한 아이가 되었지만, 당시 부모로서 아픈 아이를 대신해 줄 수 없다는 미안함과 부모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안쓰러움에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자폐증이란 신체나 언어적, 사회적으로 상호관계와 유대감이 일어나지 않는 장애로써 아직까지 원인을 아는 사람이 없다. 연구에 따르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의 조합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 말해.", "조금 늦는 아이들이 있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같은 위로들은 부모들에게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평균 발병 진단 연령이 3세에서 6세 사이이기 때문이다. 자폐증을 진단받은 아기 및 어린이들은 성인 된 후 증상이 없어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대부분 자폐 증상이 있는 우영우 같은 성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3~6세 사이의 이러한 증상을 가진 아이들을 가진 부모들에게는 잠재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자폐를 앉고 살아갈 아이들의 부모이기에 두렵고, 미안함에 호들갑 아닌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폐 증상으로는 대표적으로 눈 맞춤을 좋아하지 않는다라 던 지, 비정상적으로 무언가에 집중을 하는 특징들이 있다. 또한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이 너무 높거나 낮으며, 같은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기도 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치료법이 있겠지만, 병의 원인도 정확히 판별되지 않은 상황에서 뚜렷한 치료법 또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자폐증의 많은 증상이 뇌기능 장애로 인한 증상과 비슷하기에 피부접촉이나 고유수용감각, 전정감각 등 여러 가지 감각자극을 제공함으로써 감각통합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아동과 가까운 엄마와 아빠가 놀이 접근, 교육적 접근 등 통합적인 접근을 적극적으로 제공해 줌으로써 자신과 엄마, 아빠, 그리고 주변에 대한 인식을 늘리는 것을 목표로 놀아 주는 것 또한 방법이라고 한다.
수많은 자폐 관련 책들을 읽어봤고, 유튜브 관련 영상을 접해본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경청이었다. 아이의 모든 것을 경청하려는 자세였다. 경청은 상대방을 그 순간과 그 자리에 두고 집중하는 자세다. 상대방의 드러난 바람뿐만 아니라 감정, 표현치 않은 속마음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능동적 침묵에 가깝다. 그리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하려는 마음이다. 이것은 곧 소통의 출발이며 핵심이다. 아이에 대한 진심 어린 헌신이고 기도라는 생각으로 난 일단 아이의 행동과 말, 신체적 표현 모두를 경청했다. 사실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우리 아이는 아주 건강하고 밝게 잘 자라주고 있다. 경청으로 자폐를 이겨냈다고 말할 순 없지만, 경청으로 인해 내가 아이를 대하고 이해해주는 방법이 달라졌고, 심지어 나 스스로의 마음에도 경청할 수 있는 나름의 노하우도 조금은 알게 되었음은 분명하다.
깨어있는 시간의 70% 이상을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읽기와 쓰기, 말하기는 열심히 배워왔으나, 듣기에 대해서 가르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한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62%는 '자신은 경청을 잘한다'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경청을 못한다'는 부정적인 응답은 45%로 나타났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도 경청을 잘한다'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단 7%에 불과했다고 한다. 자신은 경청을 잘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경청을 못한다고 여겨지는 것일까? 난 그 이유를 위로받고 싶어 하고 이해받고 싶어 하는 우리의 심리에서 찾았다. 나 스스로는 남을 잘 이해해주는 반면 내 아픔과 상처는 그에 비하면 위로받고 있지 못하다는 고독감을 나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위로받고 싶은 데......' 남들을 위로해 준 만큼 나 스스로도 위로와 위안을 받고 싶지만 그러질 못하는 아쉬움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사는 듯하다.
경청은 기술이 아니다. 경청은 절제이자 겸손이다. 경청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무언가 부족하고, 남들에게 배울 것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조언, 자문, 컨설팅이란 문제 해결의 성격을 띠지만 사실은 상대 스스로 문제점을 도출하여 해결하도록 돕은 기술이고,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열심히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는 열심히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해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경청이라 함을 상대와 연결 지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내 마음속 목소리에도 경청이 필요하다. 그러한 경청을 통해 우리는 내면의 아픔과 마주할 수 있게 되고 성공적으로 치유와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로 늑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공자도 60세에 이르러서야 경청의 경지에 들 수 있었다고 하니 경청의 자세를 갖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기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하겠다.
내 마음의 위안의 소리를 경청하고자 할 때 난 그녀의 음악을 듣는다. 바로, Sara Bareilles이다. 겸손하지 못 한 자세로 거만한 마음이 넘쳐흐르려 할 때 자연스럽게 그녀의 음악을 찾게 된다. 음악이 질병 치료에 도입 된 것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2차 세계 대전 당시 부상별들에게 틀어주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국내에도 음악을 단순한 위안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치료하는 적극적 수단으로 사용하는 의료기관이 있을 정도이다. 물론 나는 음악치료사는 아니다. 그녀의 음악을 플레이 리스트로 만들어 추천하는 이유가 직적적으로 음악을 사용해 심리적, 신체적 질병을 치료하기 위함도 아니다. 이를 테면 경청인 셈이다. 가만히 상대의 말을 듣고 있는 것만이 경청이 아니다. 순간을 그 자리에 중심을 두고 상대에게 집중하는 것이 바로 경청인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 스스로와의 대화와 위안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이 글을 쓰고 있으며 이 음악들을 추천하는 것이다.
그녀의 모든 노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뽑은 10여 곡은 모두 쓸쓸한 분위기의 노래들이다.(그녀의 모든 노래가 쓸쓸하진 않다. 오히려 밝고 경쾌한 느낌의 곡이 더 많다) 귀로는 쓸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마음으로는 위로로 다가온다. 가끔은 술이나 사람에게 받는 위로보다 100% 다크 초콜릿을 먹으며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그녀의 목소리가 바로 그렇다. 자기 고백적인 가사와 쓸쓸한 선율이 어우러지며 느껴지는 몽환적인 분위기. 거기에 어쿠스틱 한 사운드를 아우르는 서정적인 목소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매만져주기에 충분하다.
Set me free
나를 풀어줘
Leave me be
내버려 둬
I don't wanna fall another moment into your gravity
또다시 너의 중력에 끌려 추락하고 싶지 않아
Here I am, and I stand
난 여기, 서 있어
So tall
꿋꿋이
Just the way I'm supposed to be
그저 있어야 할 모습 그대로 - gravity 中에서-
Say what you wanna say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말이야
And let the words fall out
그냥 말을 내뱉어버린다면
Honestly I wanna see you be brave
그런 용감한 널 정말 보고 싶어
With what you want to say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And let the words fall out
그냥 내뱉어 버리는 거야
Honestly I wanna see you be brave
그런 용기 있는 널 정말 보고 싶어
- brave 中에서 -
아름다움만이 세상을 구원한다. 도스트옙스키는 말했다. 당장에 혼돈의 시대를 걷는 우리는 매일 실망하고 자책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난 그런 편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빛을 마주하는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 믿는다. 결국 삶은 이어질 것이고, 음악은 언제나 그랬듯 지친 삶의 이면을 어루만져줄 것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분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맘 같아서는 분위기 좋은 카페나, bar에서 술이나 커피를 한 잔 하며 음악을 들으며 스스로의 위안을 찾고, 더 나아가서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으면 한다.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입에 올릴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서툴게 남의 상처를 이해하려 하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상대방에게 집중하다 보면 내 안의 위로와 경청도 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자 일단은 눈을 감고 Sara Bareilles의 음악부터 천천히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