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이 Jul 27. 2019

여전히 불안하다.

20대 중반까지만 해도 40살이 되면 모든 게 안정적이며, 더불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거라 믿었다. 그런데 막상 40살이 되어보니, 그 믿음은 어린 시절 꿈꿀 수 있을 법한 환상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깨달아버렸다. 누군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서서히 서서히 말이다.  그 믿음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이렇게 늙어 가는 건가?' 하는 생각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 한편에 들어왔다. 그 생각이 내 속으로 절로 들어왔다는 것은 마치 내가 가진 순수함이 점점 옅어지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일종의 신호였는데, 당시로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짐작컨대 이런 신호는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보내졌을 텐데, 분명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신호를 감지했다 하더라도 바쁘다는 이유로, 고단하다는 이유로 우선순위 밖으로 밀어 버렸을 것이다. "나중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이번 일만 끝내고 나서.." 했을게 뻔하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하면 나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 아마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20대의 나는 순수함보다는 풍요로움이 더 절실했으니까. 


어른이라는 이름하에 짊어져야 했던 수많은 선택과 책임들은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떠밀리듯 세상 밖으로 나온 20살의 나에게는 벅차고 무거웠다. 이제 갓 부모의 품을 벗어난 아이가 세상을 어찌 알았겠는가. (지금도 도통 모르겠는데) 성적에 맞춰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미래, 금전적 가치에 저울질되었던 나의 꿈, 성적과 직업에 인생을 맞춰야만 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 적응해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보다는 눈치를 봐야 했고, 분위기에 맞춰 살아가야 했다. 그래야만 낙오자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시절의 내가 필사적으로 보냈던 시간들이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서글프다. 차라리 그 시간들을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탐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시간적인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눈 앞에 놓여 있는 수많은 선택들 앞에서 고민할 시간도 없이 결정했던 것들은 고스란히 책임으로 돌아왔고, 그 선택들은 내 인생의 방향이 되어 버렸다. 그 방향이 어렴풋하게라도 마음에 품어온 것과 비슷했다면 좋았을 텐데.  


<마흔의 눈물>


20대의 나는 선택, 책임, 결정 이런 것들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왔던가. 40살이 되면 분명 이로부터 자유로워 질거라 믿었고, 그 믿음을 확인 하고 싶어서 하루빨리 40살이 되고 싶었다. 40대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변의 인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같이 여유로워 보였고 듬직해 보였고 실로 멋있고 풍요로워 보였다. 거친 풍파에도 흔들림 없는, 뿌리가 튼튼한 거목 같은 그 모습을 동경했었다. 나도 뿌리가 튼튼한 나무가 되고 싶었다. 막연했지만 그래도 40살이 되면 나도 그리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어느덧 40살이 된 지금, 자유롭기는 커녕 여유롭기는 커녕 선택과 책임의 무게는 더욱더 묵직해져 버렸다. 이제 막 주민등록증이 발급된, 아이도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것 같은 애매한 상태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 것 같다. 나이가 많은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어린것 같지도 않다. 적당히 세상을 알아 버렸고, 마음만큼 체력이 따라 주질 못하게 되었고, 작은 바람에도 내 몸과 마음은 세차게 흔들리고, 도전정신보다는 안정적인 것을 선호하고, 투쟁보다는 타협이 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는 젊음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여전히 존재한다. 나는 여전히 자유롭고 싶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많은 시간들을 허비하며 살아가고 있고, (20대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나는 불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