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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 Sep 05. 2019

잘 걷고 싶다.

걷는 것을 좋아했었다. '했었다.'라고 이야기하니, 마치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기분이다. 누군가 "걷는 거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넵!" 하며 단호하게 대답한다. 한때, 걸어서 30분 정도의 거리는 무조건 걸었다. 비가 와도, 감기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도, 더워도, 추워도, 낮이고 밤이고 상관없이 가능하면 걸으려고 했었고 걸었다. 나는 여전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고 그렇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요즘의 나는 도통 걷질 않는다. 좋아한다 말은 하지만 행하지 않는 것을 과연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어찌하여 걷는 것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걷지 않는 사람이 된 걸까.


실제로 많이 걸었던 시절을 떠올려 본다. 나는 무엇 때문에 걸었을까. 걸음에 대한 이유를 자문해 보니, 그 시절 '걸음'을 앞에 두고 고민하던 내 모습이 보인다. 보통의 사람들은 매일 어딘가로 이동을 한다. 나 역시 보통의 사람이었고, 매일 집 밖을 나서 어딘가로 이동해야만 했다.


하루 일과 중에 하나인 어딘가로의 이동은 관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삶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동 방식, 이동시의 피로도, 이동하면서 겪거나 느끼는 다양한 체험과 감정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고 어떤 목적을 실행함에 있어 제법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이동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동의 질 또한 놓쳐서는 안 될 요소라는 말이다.


이동수단으로써 '걸음'을 선택했었을 당시에는 이 부분을 간과했었다. 단순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했다. 나에게 이동수단으로써의 걸음은 빈곤한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선택한 것이었다. 애써 외면했던 그때의 감정을 들여다본다. 어떤 왜곡도 없이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버스비가 아까워서 걷는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부끄러운 일도 숨길 일도 아니다. 거기에다, 누군가 "버스 타면 될 텐데 왜 그렇게 걸어 다녀요?"라고 묻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안절부절못하며 공공연하게 "걷는 걸 좋아해서 웬만하면 걸어 다닙니다."라고 선수 치듯 이야기하고 다녔다. 돈 아끼려 걸음을 선택하는 것이 퍽이나 부끄럽게 느껴졌나 보다. 이렇게 내뱉은 말들이 쌓여 갈수록 나라는 존재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고, 나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게 되어 버렸다. 돈이 아까워서 걷는다는 것을 숨겼던 마음이 언어로 만들어졌고, 그 말이 조금씩 나를 잠식해 버렸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동의 질을 신경 쓰기보다는 그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었다.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오공처럼 순간이동이라는 멋진 기술을 사용할 수 있길 소망했다. 매일 아침마다 순간이동을 간절히 꿈꿨지만, 주어진 현실 앞에서 그런 얄팍한 요행을 소망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망상에 불과했다. 그런 망상에 현실을 빗댈수록 현실은 더 구질구질하게 느껴질 뿐이니까. 이동의 질을 생각했더라면, '걸음'이라는 것이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텐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고 사색을 즐기며 내딛는 걸음걸음이 중요했을 텐데. 그때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다시 되짚어 본다. '나는 여전히 걷는 것을 좋아하는가.' , '나는 걷는 것을 좋아했었나.' 이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겠다.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목적으로 만들어낸 그 언어는 거짓된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언어에 힘을 실어준 나의 한걸음 한걸음들 또한 거짓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걸었고, 그 기억들의 대부분은 좋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걷기를 멈췄기 때문인 것 같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즐겨 걷는 것을 멈췄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어째서 즐겨 걷지 않는 사람이 된 걸까.'


걷든, 뛰든, 먹든, 놀든, 일을 하든 내가 하는 행위의 모든 것에 필요한 절대적인 조건이 있다. 시간이다. 걷지 않는 것에 대단한 이유라도 있을 것 같았는데, 단순하고 명확하다. 걷는 것에 할애할 시간이 없어진 것이다. 걷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무언가를 위해서 걷기에 사용될 시간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아끼려 버스를 타기 시작했고, 나아가 승용차를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좋았다. 편리했고, 편안했다.


편리함 앞에서 나는 한 없이 간사했다. 불편한 것, 걷는 것이 익숙해지기까지 쏟았던 노력들은 편리가 선사하는 달콤함 앞에 금세 잊혔다. (문명의 힘을 빌어 이동하기로 결심한) 당시로서는 그 노력들의 잊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니 망각하고 싶었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편리함은 금세 익숙해졌고, 한번 맛 본 달콤함을 잊지 못해 계속해서 갈망하게 되었다. 편리함을 갈구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본능 일지도 모르겠다. 본능에 충실한 나에게 걷는 것은 결국, 시간낭비와 귀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로 인해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덥거나, 춥든 언제나 함께 였던 걸음을, 내 삶 속의 일부였던 걸음을 매몰차게 밀어냈다. 그런 주제에 '걷는 것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해서 확신에 가득 차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내 모습은 어쩐지 밉상이다.


요즘 들어 베란다 너머로 분주하게 걷고 있는 사람들에 시선이 간다. 걷는 이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문득, 편리함에 익숙해져 잊혔던 노력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찬란한 미래를 그렸던, 청아한 하늘을 보며 평안한 마음이 되었던, 자동차의 매연에도 굴하지 않는 가로수의 우직함에 경의로움을 느꼈던, 바람이 피부에 닿는 감촉을 통해 살아 있음을 깨달았던, 다양한 이들의 희로애락을 지켜보며 삶의 무게를 실감했었던 그 시절의 감성들이 와 닿았다.


<걷는 것>


다시 걷는 것에 시간을 할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면서 놓쳤던 일상의 풍경을 눈에 담아내고프다. 그 시절의 순수했던(것 같은) 마음을 찾고 싶다. 누군가 걷는 것을 좋아하냐고 다시 물을 때, 실제로 즐겨 걷는 상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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