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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길을 달리다

동해안 자전거길(경북)

by 김입문

낯선 출발


시작은 대구였다. 서울에서 동해를 간다면 강릉부터 시작해서 내려가야 하는데, 그러면 힘은 힘대로 다 빠지고, 집에 가는 길은 멀어지고… 다행히 나에겐 고향집이 있으니, 어머니의 걱정을 뒤로하고 즐겁게 출발할 수 있었다.


30대들이 모닥모닥 모여서 자전거를 타고 동해안을 돌아다니겠다니—게다가 퇴사한 회사 친구—나라도 없던 걱정도 불러오겠다는 느낌이 드는 구성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젠 고향집에서 출발이 더 낯설다는 게 어쩐지 쓸쓸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출발… 하지 못하고 짐칸 앞에서 버벅거린다.


자전거를 싣는 과정부터 쉽지가 않았다. 익숙한 짐도 아니니 어떻게 넣어서 고정해야 할지도 막막하고, 우리 둘 말고 자전거 승객이 한 명 더 있어서 어떻게 욱여넣어야 세 대가 들어가나 고민도 된다. 드넓은 짐칸에 자전거를 구겨 넣으니 좀 좁아 보인다. 아무튼 마지막 승객 분이 접어달라는 대로 자전거를 잘 접었더니 세 대가 다 들어갔다. 버스 문 앞부터 진땀을 빼며 드디어, 아무튼 출발.


이 모든 버벅거림을 어머니가 뒤에서 보고 계셨다. 성격상 내가 조금이라도 버벅거리면 뛰쳐나올 텐데 참느라 고생했겠다. 하여간 탔다는 걸 보고 안심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보니 나는 아직도 그저 “엄마 딸”이구나 싶어서 마음이 뜨끈해진다. ‘집에 며칠 더 있을걸 그랬나…’ 이런 쓸쓸한 마음을 알 길 없는 야속한 버스는 냉랭한 에어컨을 뿜으며 달려 나간다.



언덕을 포기하는 의미


버스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깨니 어느샌가 우리의 출발지—울진에 도착했다. 오늘 갈 자전거 길은 동해안 국토종주길(경북)이다. 울진에서 영덕까지 76km를 달린다.


동해안 길은 꽤 힘들 거라는 주의를 들었기 때문에 각오는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냥 자전거도 아니고, 텐트를 실은 무거운 자전거를 몰고 다녀야 한다.


평온한 바닷가 길은 좋았지만 이곳은 강원도다. 눈앞에는 오를 수 있다는 기대조차 들지 않는 언덕이 보인다. 보통은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는 말이 먹히지만, 이 정도쯤 되면 그 말이 잔혹하게 들린다. 나는 이 작은 언덕은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에 동해안 길은 끝까지 가기로 했다.


언덕에서 포기하지 않고 고집부리면 어쩌면 언덕은 오를 수 있겠지만, 다리에 근육통이 너무 심해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럴 땐 빠른 후퇴도 전쟁을 이기는 방법이다.


장거리는 내 페이스로 달려야 끝까지 달릴 수 있다. 계속 뒤처진다고 남들을 쫓아 뛰면 중간에 완주를 못 하고 레이스를 포기하게 된다. 내 다리에 맞는 속도가 아니니까.


레이스를 이어서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는 포기한다. 패배도 인정한다. 끝까지 달리고 말 테니까.


비장하게 말했지만, 멋없이 터덜터덜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는 동안 들었던 생각이다. 언덕에 자전거를 끌고 가는 행위는 상당히 모양 빠지고, 진 느낌이고, 굴욕적이다. 정상엔 터널이 보인다. 오르면 뭐 하나, 언덕을 무거운 짐을 밀면서 올라와서 이미 기진맥진이다. 이 와중에 정상에 어두컴컴한 길까지 지나야 하는구나 싶다. 정상에 오르자마자, 그러니까 터널에 들어서자마자 딱! 그 생각이 어두컴컴한 마음이 멈췄다.



터널 끝에


터널 끝에 바로 바다가 보였다. 오르막이 너무 길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긴 오르막이어서 내리막도 길었다. 해변이 보이는 긴 내리막. 오르막에선 보이지 않던 해변이 굽이굽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리막에 다다라선 바다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동해안을 달리고 있다는 실감이 든다.


내리막이 길어지니 중간에 살짝 겁이 나기도 했는데, 바다가 예뻐서 속도도 힘듦도 다 잊어버렸다. 그래, 나는 바닷가를 달리고 있다—그러니까 힘들긴 한데 괜찮다. 끝까지 가보고 싶다.


마음을 이런 식으로 한 스무 번쯤 들었다 놨다. 그러다 보니 오늘의 종착점에 도착했다.



바다의 층간소음


1인용 텐트는 심플하다. 들어가면 누워서 잔다. 사실 몸이 힘들기 때문에 머리를 바닥에 대기만 해도 잠이 온다. 밖에 나와서 보면, 친구와 내 텐트가 바닷가에 놓인 스탠드 조명처럼 보인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처음 펼치는 텐트는 어려웠지만, 어쩐지 배에 돛을 펼치는 것처럼 신기하고 재밌었다. 텐트 안은 파라오의 관처럼 어디 크게 굴러다닐 수는 없다. 벽 하나 없는 얇은 천의 집. 두터운 벽을 두고도 위아래로 소음이 나서 예민한데, 이 천조각 집은 오죽할까? 서라운드로 시끄럽다. 파도 소리로—


바다가 시끄럽다. 파도 소리가 쉬지 않고 들린다. 온몸은 뻐근한데, 이놈의 옆집이 시끄러워서 좋다. 파도 소리를 더 길게 듣고 싶은데, 눈이 감긴다.


평소엔 새벽 3시에도 잠이 안 오는 날이 있는데, 지금 11시도 안 됐는데 눈이 감긴다… 기절이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깊이 푹 잠이 든다. 바다의 층간소음 덕이다.



커피 한 잔


다음 날 아침, 몽롱한 채로 이슬이 맺힌 차가운 텐트를 연다. 싸늘한 바닷바람이 텐트 사이로 들어온다. 해가 뜬다. 멍하니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어느새 깼는지, 친구가 커피를 한 잔 끓여주었다.


살짝 추울 때 마시는 따끈한 커피는 어쩐지 위로가 된다. 일하면서 이 친구랑 맛있는 걸 먹으며 다녔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힘들 때마다 맛있는 걸 먹으러 다녔다. 차가운 바닷공기도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해가 뜨면서 서서히 따끈해진다. 해 뜨는 시간 동안 버티게 해 준 커피 맛은 잘 잊히지가 않는다.


동해안 길은 그렇게 언덕에 질려하다가, 바다에 감동하다가, 어느새 지칠 때쯤 끝나버렸다. 집으로 오는 버스에서 시체처럼 자다가 자전거를 집 앞에 세우니 그곳에 있던 시간들이 갑자기 환상이었나 싶기도 하다. 동해안 길, 바다가 펼쳐진 내리막과 밤바다의 파도 소리와 쌉싸름한 커피 맛이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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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