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단하는 킴제이 Jul 02. 2022

나는 오늘 죽는다 01

디지털 노마드, 삶은 여행이기에


ONE, TWO, THREE

미드에서 본 것처럼 원, 투, 쓰리에 맞춰 침대로 옮겨지고 바로 바지와 모든 옷이 가위로 주-욱 잘려나갔다.

바로 CT, MRI 촬영이 진행되었고 가장 우려했던 목뼈는 부러지지 않았고 의사는 내가 블랙아웃하지 않았음이 다행이라고 했다. 


"Do you speak English?"

"Yes.."

"Can you squeeze my hand?" (내 손을 꽉 쥐어볼래?)

손을 흔들라는 건가? 손을 흔들었다


"..... Do you really understand what I am saying? blah blah"

"Yes I do? " (네 듣기 평가는 잘해요)

"Would you be able to squeeze my hand as much as you can?"(네가 할 수 있는 만큼 꽉 쥐어봐)


아 더 손을 높이 들으라는 뜻인가 봐. as much as! 팔을 쭉 뻗어 손을 흔들었다. 의사의 표정이 좋지 않더니 다른 검사가 더 진행되었고 때마침 나온 촬영에선 뇌출혈이 진행되고 있으니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몇 명의 친구들이 내 앰뷸런스를 따라왔었고 의사와 대화를 나눠줬다. 통증은 무거웠으며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A와 대화를 하다가 잠깐 시계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A를 보면 A가 아닌 B가 있었다. A는 어디 갔냐고 물으면 B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이 계속 여기 앉아서 나와 대화를 했다고 했다. 엄마 아빠가 내 사진 앞에서 울고 있는 상상이 나를 엄습했으며 지금까지 지내온 짧은 시간이 나를 덮쳐 숨을 조였다. 큰 병원으로 옮겨졌고 새벽에 수술이 잡혔다. 다행히 뇌 안쪽이 아니라 밖으로 피가 흘러나왔고 머리뼈도 최소한의 절개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괜찮다고 하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머리를 열어야 한다고?



아이스링크장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넘어졌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하키 시합이 있었고 얼음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우리를 들여보냈고 스케이트를 이제 막 배워서 탔던 나는 스케이트 칼날이 그대로 깊이 파인 홈에 미끌하고 발목이 얻나가더나 공중으로 어? 붕 하고 떠오르더니 떨어졌다. 몰려든 친구들이 민망해서 웃으면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에 통증이 무거워서 얼음판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친구들이 다가와 겉옷을 벗어 덮어주었고 그 품에 있어도 추웠고 토할것 만 같았다. 한 분이 오셔서 자기 차를 빌려줄 테니 병원에 가자고 했고 (미국의 앰뷸란스는 보험이 안된다는 걸 몰랐던 나는 ) 한사코 거절하며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나갔다. 나중에 아이바르 키가 말해주길 내가 높이 붕 뜨더니 머리부터 떨어져 공처럼 머리가 튕겼다고 했다.




수술 시간을 기다리는데 잠을 잘 수가 없다. 당장 한국에 전화를 해서 엄마 아빠한테 상황을 알려야 하는데 국제카드랑 인터넷 전화는 다 기숙사에 있어서 같은 방을 쓰던 언니가 다음 날 가져오기로 했다. 지금 핸드폰으로 짧게라도 연결되지 않을까 하고 폰을 봤다가. 수술을 할 거라면 걱정하실 텐데, 지금 전화를 안 했다가 영원히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고민 줄을 잡고 있다가 하지 못했다. 


잠들었었나 불안해서 눈을 질끈 감고만 있었나 의사 선생님들이 들어오셨고 수술 전 출혈 상황을 보기 위해 다시 사진을 찍었다. 머리 어느 쪽을 밀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셨던 것 같은데 여전히 나는 받아들이지 못한 채 Okay, Alright 불안하면서도 아직도 명확히 판단되지 않고 영어만 둥둥 떠다니는 이 공간에서 내가 꿈을 꾸거나 남의 영화에 잠깐 구경온 것 같았다. 


"아! 출혈이 멈췄네요! 수술은 지금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의사 선생님들은 출혈이 멈췄고 뇌 안으로 피가 났으면 위험한 상황이지만 다행히 나는 뇌 밖으로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나왔고 멈췄으니 자연스럽게 피가 스며들 거라고 했다. 나는 일주일간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못했다. 온몸에 호수가 연결되었으며 매일 대소변도 침대 위 패드였나? 어떤 장치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내 몸을 들어 치워 주실 때는 거대하고 찬 고깃덩이가 된 것 같았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이 몸이 들릴 때마다 통증에 짓눌려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내 옆칸에 누군가 실 펴왔던 것 같은데 밤이 되니까 계속 Help Help.. 간신히 뱉어내며 힘들어하셨다. 괜찮냐 물어도 답이 없고 또 시간이 지나면 아주 작은 목소리로 Help라고만 외쳐 힘겹게 내가 버튼을 눌러 간호사를 부르기도 했다. 밤만 되면 할머니는 Help를 외쳤는데 한 번은 호수들을 이끌고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와 곧 간호사가 올 거니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내 말을 못 들으셨는지 알아듣지 못했는지 허공으로 신음소리만 낼뿐이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힘겹다는 자체가 날 힘들게 해 침대에서 울다가 잤다.


"그래도 수술을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이야."


다음날 아침부턴 내가 혼자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다. 침대 옆 화장실까지는 갈 수 있었고 점점 몸은 나아졌다고 리포트를 해주셨지만 통증은 심했다. 의사 선생님이 원래 가장 통증이 큰 곳만 느끼는데 안정이 되면서 다른 통증들도 이제 몸이 느끼게 될 거라고 하셨다. 걷는 재활 훈련을 시작했고 한분이 계단 오르는 걸 연습해보자고 하니 옆에 있던 분이 계단은 무리라고 하니 서로 지금 해도 되는 단계다 아니다 체크를 하셨다. 내가 걸을 수 있는지 아닌지를 왜 의논까지 해야 하나 계단을 3칸 오르고 찬찬히 돌아 다시 내려왔다. 박수를 쳐주시며 기뻐하셨지만 나는 더 절망스러워졌다.



"나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것 도 많은데, 그리고 나는 미국에 가족이나 알고 있는 친척도 아무도 없단 말이야?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난 너무 어린데"


"킴제이. 너는 좋은 사람이니까 살아 있는 거야. 누군가는 죽을 수 있었어. 네가 잘 살아왔으니까 그 운으로 네가 산거야."


"그러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다. 고마워. 무스타파 나는 진짜 이 세상의 모든 맛있는 걸 먹고 싶어"


"응 킴제이 넌 그렇게 살 수 있을 거야. 넌 영혼이 정말 건강하고 멋지니까"




퇴원을 하고 재활훈련을 지속해서 받았다. 달팽이관이 흔들렸던 부작용으로 나는 길을 잘 걷다가도 저 지평선이 기울어지면 어? 하고 넘어지곤 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S발음이 신경질적인 쇳소리로 들려서 몸에 소름이 끼쳤다. 


몇 년이 지나 생각해보면 정말 큰 일이었다. 나는 아이스링크장을 고소할 수 있었고 우리에게 안전수칙을 알려주지 않고 보호장비를 챙기지 않은 학교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책임감 때문이었는지 모든 보험처리를 나서서 해주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갈 때는 친구들이 뒤따라와주었다. 실려가는 와중에도 내가 딴생각할까 봐 빈틈없이 웃겨주었으며 사진을 찍었다. 밤까지 함께 대화를 나눠주다가 숙소에서 내 짐들을 챙겨 아침에 바로 가져다주었고 수술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매일 병문안을 와주었다.


그 힘으로 내가 무스타파에게도 세상의 맛있는 음식을 다 먹어보고 싶다는 희망도 건넬 수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어 부모님께 전화를 할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배려해 주었다. 3개월 어학연수와 기숙사를 프로그램에 참여한 거였는데 2개월 차에 사고가 났었다. 한 달 정도면 걷는 연습을 더 충분히 해서 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걷는 게 어려우면 언젠가 어디 티브이쇼에서 봤던 것처럼 침대에 내 몸을 고정한 채로 비행기에 태워져 한국으로 가면 된다.


맨 처음 부딪혔던 머리 부위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고 머리와 목의 통증의 지배에 기숙사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한국에서 친구가 전화가 왔는데 왈칵 울어대더니 평생 장애를 가지고 살 나를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고 했다. 걱정해줘서 고맙다는 말만 하고 끊었는데 속상하고 무서워서 울었다. 친구가 말로 뱉어내 버린 모른 척했던 불안감이 터져 올랐다. 어서 한국에 가고 싶었다. 혹시나 모를 일들을 다 검사받고 한국말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병원 담당자에게 이제 한국에 갈 거라고 필요한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전화했다고 하니 지금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했다. 기압 때문에 다시 뇌에 출혈이 생길 수도 있고 지금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 기숙사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1주 정도 남았고 그다음 머물 숙소는 없었다.



친구 말대로 장애가 날 따라올 것 같았다. 여긴 가족도 친척도 없다는 불안감이 나의 분노를 자극했다.


2편

https://brunch.co.kr/@kimikimj/46


I DO ME

나는 나를 하는 사람. 나를 아는 것이 직업인 킴제이

왜 여행과 일을 통해 나를 찾아가는지 시작하게 된 이유, 파편들을 적어봅니다,









작가의 이전글 세이프존 넘어서는 식은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