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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단하는 킴제이 May 08. 2023

이 순간을 무엇으로라도 남겨야 해

네팔 4130m 안나프루나 캠프에서 라즈와의 대화

"킴제이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아름다워. 인생에서 꼭 지금 네가 느낀 것을 무엇으로라도 만들어 남겨야 해"

안나프루나 캠프에서 데우랄리 캠프로 내려오는 길. 우박이 벚꽃처럼 휘날리는 따가운 추위에서 라즈가 말했다.

4130m 고지를 찍고 내려오는 길. 올라가는 길에 묵었던 3200m 숙소에서 다시 자는데 그토록 춥던 숙소가 포근하게만 느껴졌다. 오후 4시가 되면 다 같이 모여서 명상을 했다. 마지막 지누 단다 캠프에서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요가니드라 (Yoga nidra : 요기들의 잠.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수면상태를 유지하는 명상. 사바사나를 오래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를 라즈 선생님이 진행해 주셨다.

10일 동안 오르고 내렸던 히말라야의 순간들을 다시 한번 읊는 시간을 가졌다. 2일 차에는 뭘 했는지 3일 차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이야기를 하며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훑어보고 다시 차곡차곡 쌓았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나에게 10일의 히말라야 요가 트레킹 시간이 무든 사계절을 누벼 1년을 산거 같은데 내려와서 선생님과 함께 시간을 나열하니 10초의 시간 같다. 나의 시간이 1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10초 같기도 하고 시간은 일렬로 순서대로 흐르는 게 아니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처럼 내가 가지고 싶은 기억들이 꽂혀있는 게 시간이다. 다 같이 모여 오늘의 소감을 말할 때 그렇게 말했다. 나만의 시간, 책을 책장에 꽂아가며 살고 싶다고.


너무나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가만히 산을 보고 있자면 휩싸이는 구름에 1초마다 세상이 바뀌었다. 쨍하고 맑았다가 잠깐 차에 물 받아 오면 회색 구름이 설산들을 휘감고 있었다. 다 같이 믿을 수 없다며 눈길을 쫓아 눈 쌓인 산맥들을 찾았다. 매 순간을 온 마음과 몸을 다해 살았다. 어느 날은 라즈가 명상을 하듯이 조용히 걸어보라고 가이드를 해주었다. 호흡에 맞춰 아주 찬찬히 걸었다. 숨소리만이 가득 퍼지고 발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몸이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이걸 글로 어떻게 풀어써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산과 내가 하나가 되어 둥실둥실 떠밀려가듯이 산을 올랐다. 라리사와는 지금 이 시간들이 너무나 아름답다며 말을 아끼지 않고 퍼부었다. 샤샤 아저씨는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며 대화를 나누다가 조용히 우셨다. 라리사는 감정은 아름다운 것이라며 위로해 주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따스해서 가만히 찻잔을 더 꼭 쥐었다.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따뜻하다.


멜라니는 나를 만나서 노래를 흥얼거리게 되었다고 했다. 산에서 멜라니 노래를 들으며 한걸음 더 나갈 수 있었다. 인터넷도 되고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에서는 멜리니가 흥얼거렸던 노래를 스포티 파이에서 찾아 들려주었다.

둘이서 머리를 뱅뱅 돌리며 춤을 추었고 한참을 웃었다. 샤워를 하고 밖에 나가니 라즈, 라리사, 멜리, 샤샤가 산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너무나 든든하고 아름다워서 다 같이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글을 쓴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눌러 담으며 내 친구들을 기억한다.


2010년도 큰 사고로 뇌출혈이 있었다. 한동안 모든 호수에 휘감겨 침대에만 있었고 걷는 것부터 연습했다. 평행기관 이상으로 걷다 보면 화면이 대각선으로 흐르고 나는 쓰러졌다. 계단 두 개만 올라가도 박수를 받는 것이 억울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는 내게 영원히 장애가 있을 거라며 엉엉 울었다. 다행히 나는 회복했지만 3000미터가 넘는 산에 오르는 게 두려웠다. 오른쪽 고막도 안 좋고 넘어짐에 대한 극도의 불안함이 아직까지 있다, 떠나기 전날에는 무서워서 눈물까지 났다. 수딥 선생님이 'I am hear to listen you'라며 위로해 주었고 친구들이 안아주었다. 잘 다녀오라며 다들 내게 등산복이랑 약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정말 안나프루나 캠프를 찍고 매일매일 산에서 요가와 명상을 했다.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에 의해 생기는 것인데 그 경험이 현재까지 진행되는 게 아니라서 내가 마음먹으면 놓아버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태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일도 잘하고 마음관리를 잘하길래 들여다봤더니 명상과 요가를 했다. 그게 신기해서 따라다니면서 요가를 했더니 네팔에 왔고 그러다 보니 내가 히말라야를 올랐다. 엄청나게 아름다운 이들이 말도 안 되게 다가와서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간다. 그래서 쓴다. 내 보물들. 하나하나 이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모아 내 품에 한아름 안고 싶다. 책꽂이에 하나씩 꽂아두고 살아가며 한 번씩 다시 펼쳐보고 싶은 든든한 책들이다. 


라즈는 내게 오늘은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답했다. 

"Raj. Seriously. I am the maker of my own destiny"

나는 내 인생의 개척자야.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놓칠 수가 없어! 너무 신난다 진짜.


이 시간이 내게 온 이유를 안다. 몇 년간 일과 스스로에게 쫓겨 내게 친절하지 못했던 시간을 위로해 준다. 잘할 수 있다고 애써 나를 앞으로 밀어내고 성취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가만히 내 마음그릇을 잘 살피면 된다. 좋은 일이 있을 수밖에 없거든. 잘 될 수밖에 없거든. 내 그릇을 넗혀 두고 잘 담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혼자서 3개월간 여행하며 겪은 이야기들이 설명이 안된다. 아름다운 이야기. 그래서 쓴다. 


몸이 기억하라고 손가락에 눌러 펼쳐보고 마음에 하나씩 차곡차곡 다시 넣어두라고 눈으로 읽으며 쓴다. 

정은아 내가 너의 인생이 얼마나 위대하고 다채로운지 글로 잘 써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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