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엘라 Jan 21. 2022

별것인 별것 아닌 일, 냉장고 청소

우울증 치료 이야기

  
  비일상적인 일들이 며칠 사이에 일어났다. 갑자기 집 전기가 끊겼고,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고, 나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만큼은 걱정 없이 축 늘어져서 가만히 있고 싶었는데, 나는 입원하고 바로 다음날 담당 의사에게 잠시 집에 다녀오겠다고 ‘외출 허가’를 요청했다. 그 이유는 바로 다름 아닌 ‘냉장고 청소’ 때문이었다. 



  입원하기 하루 전날 알 수 없는 이유로 전기가 끊겨서 집안 전류의 흐름은  멈춘 상태였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냉장고의 작동도 멈췄고 냉동실을 가득 채운 성애가 바닥으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냉장실 안에는 에멘탈 치즈, 토마토소스, 요구르트, 먹다 남긴 감자요리가 조금 남아있었다. 벌써 하루가 지나서 냉동실 얼음이 다 녹아 바닥이 물에 흥건히 젖어있을 것이고,  음식물들을 그냥 놔두면 서서히 썩어갈 것이 뻔했다. 그래서 그 상황을 어서 빨리 수습하고 싶었다. 참 별거 아닌 일이지만 그때는 좀 강박적으로 한시라도 빨리 냉장고 청소를 끝내고 싶었다. 뭐 당장 수습하지 않아도 괜찮지만 계속 그 망할 놈의 ‘냉장고 청소’ 생각이 머릿속 한편에 맴돌았다. 병원에 오기 전에 냉장고 문을 열어 놓고 나왔는데 '혹시라도 그 속으로 벌레가 침투해서 벌레들이 득실득실해지면 어떡하지?', '어쩌면 쥐도 나올 수 있는데.. 쥐를 혼자서 잡을 수 있을까'와 같은 지나친 걱정들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이런 식으로 '냉장고'에 대해 줄줄이 따라오는 잡생각을 줄이고자 입원하자마자 외출 허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집에 다녀온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뭔가 터문이 없는 이유로 들릴 것 같았다. 그저 집에서 꼭 정리해야 할 것이 있다고 에둘러서 얘기하고 다행히 허락을 받았다.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예상대로 냉동실 칸 얼음이 거의 다 녹아서 바닥이 한강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냉동실 구석에서 얼어있던 오래된 피자는 반쯤 녹아 맥이 풀린 사람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다행히 벌레는 한 마리도 안보였다. 일단은 그 피자와 냉장고 안에 있던 오래된 음식물을 다 버리고, 내부를 한번 싹 닦아냈다. 항상 언젠가 냉장고 내부 청소를 해야지라고 생각만 하고 청소를 미뤘는데, 항상 미루던 ‘그 언젠간’이 ‘오늘’이었구나 깨닫는 순간이었다. 성가셨던 청소를 마치니 마침내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신경 쓰이는 사소한 걱정거리 하나를 해결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말끔해진 부엌을 바라보니 마치 내가 목욕을 끝낸 것처럼 개운했다.



  청소를 마치고 냉기를 뿜어내는 싸늘한 집안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금방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나는 늘 삶에 일어나는 별것 아닌 것에 얽매여서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 모른 채 지나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살아가면서 '냉장고 청소' 같은 사사로이 신경을 써야 할 일은 늘 존재한다. 그런 '사사로운' 일에 정신을 휩쓸리지 않고 '진짜 중요한' 일에 집중해서 '삶'이라는 평균대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가야 한다. 균형 잡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걸음 한걸음 집중해서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은 참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무지하게 피곤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아무튼, 집 청소를 마치고 드디어 나는 병원에서의 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예술가인가 그냥 우울증 환자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