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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 Sep 28. 2020

골목길에서 만난, 그날의 기억

만나기 두려웠던 순간과 조우하는 용기를 얻은 날


어제 개인레슨 중간에 시간이 비어서

대사관 거리를 돌아다니며

쿠웨이트 대사관을 지나 네덜란드 대사관까지

그저 이렇게나 많은 대사관들이 한 길에 모여있는 것이

너무 새롭게 느껴졌다.


늘 차로 다니기만 하던 길을 해질녁에 두 발로 걸어보니

어찌나 어색하던지~

벌써 3개월을 꽉 채워 거의 매일 오가던 곳인데

낯선 곳에 떨어진 것처럼 너무 어색했다.

그런 어색함을 어디서 느껴봤을까?

길을 잃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그 기분을 따라,

정말 한번도 가지 못했던 길을 가고자 대사관 뒷 골목으로 들어섰다.


와.. 여긴 정말 딴 세상이구나.

큰 길가에 화려하고 특색있던 건물들과는 달리

오밀조밀 모여서 모두가 비슷한 색을 가진 집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골목..


그런데 그런 느낌이 그저 궁금하기도 하고

사실 그 순간에는 길을 몰라 헤매이는 걸

즐길 심산이기도 했다.


왠지 스마트 폰을 꺼내기엔

그 길의 정겨움에 방해가 될 것 같기도 했고..

어차피 길은 나오겠지 하면서..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지금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묻어 두었던..그래서 그 글자를 봐도

아무 감흥이 들지 않았던..

보광동 이라는 글씨가..

어느 집 대문 주소판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그날의 기억이 머리를 딱 스친다.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이제는 143번인지 401번지도 모르겠는

보광동이라는 표지판이 달린 84번 버스를 타고

이태원인지 보광동인지도 몰랐던 그때,

기숙사 점호를 마치고 탈출해

밤마실을 나왔던 그날.


그날 발목을 다치기도 했고

그 발목의 영향이 아직까지도

나에게 남아 있는데..

아픔도 모르고 그저

탈출의 일탈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던 그날..


아마 그날이 내 생애 최고의 일탈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무모했던 하루였지 싶다.


어렸기에 가능했고,

혼자가 아니었기에 그럴 수 있었던

순간들..


그런데, 그날이 나에겐

그렇게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저 딱,

발목이 다친 순간 이후는

거의 잊고 있었다..

어쩌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럴지도 모른다지만..

사실 기억이 다 남아있었던거다..


그런 사실들이

돌아돌아 어딘가 숨어 있다가

어제 그 골목길에서

그냥 딱 떠올랐는데

이젠 피하고 싶지 않았다.


재미와 불안이 함께했던

그 시기,

그 불안을 애써 숨기려고 도망다니기에 급급했던

내 자신이 그 안에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날의 기억을 더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가보는 길을

가보겠다는 심정으로

그날도 그런 일탈을 꿈꿨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제의 경험과 맞물려

다시 떠올랐는지도..


어떤 게 진짜인지

어떤 연결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제 드디어..

마주할 수 있게 된 것..

조금씩 나아갈 수 있게 된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른쪽 뒷꿈치를 제대로

찾아갈 수 있게 되어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일까?


내가 다쳤던 다리가 어느쪽일까?

나는 무엇을 더 원망하고 있었나?


명확하고 확실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가보는 수밖에..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우선 Keep Going!

그러다 막히면

다시 돌아나오길 반복하다가

다시 마주하기 까지 20년이 넘게 걸렸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를 스쳐갔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쉽지는 않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숨을 쉬면 또 뭔가 오겠지.

그래도 괜찮다.

살아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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