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얼라잎 May 20. 2021

04. 진품명품

아이를 키운다는 건 04화

“아! 저거 먹는다 그럼 어떡해??”


친정 부모님 댁에서 아이가 온 집안을 뒤지고 놀다 어디선가 츄파춥스 막대사탕 꾸러미를 발견했다. 열댓개 정도 되는 츄파춥스가 비닐봉지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이가 난생 처음 보는 알록달록한 물체를 만지작거리며 싱글거리는 모습을 본 순간 내 입에서 새어나온 탄식이다.


하지만 약 20개월의 인생을 사는 동안 아직 한 번도 사탕이란 것을 먹어본적 없는 아이는 츄파춥스가 사탕인줄도, 맛있는 간식인줄도, 심지어는 먹는 것인줄도 몰랐다. 그저 알록달록하고 동그란 모양이 예뻐서 작디 작은 손에 그 열댓개의 막대를 한 번에 다 쥐려고 손가락을 쫙쫙 벌리며 안감힘을 쓸 뿐이었다. 손에 쥐었던 사탕 몇 개가 계속 무리를 이탈하면 다시 주워 손 안으로 끼워 넣는 작업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남편은 막대를 가지런히 모아 고무줄로 묶고, 삐죽삐죽 엇갈린 막대가 행여나 아이를 다치게 할까 화장품 입구에 씌워져있던 보호 캡을 가져와 그 안으로 막대들을 모두 밀어넣고 빠져버리지 않도록 접착 테이프로 동여매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 모양이 흡사 꽃다발 같았다. 막대사탕 꽃다발. 아이는 둥그런 꽃처럼 가지런히 모아진 츄파춥스 꽃다발을 보고는 매우 흡족해하며 하루종일, 몇 날 며칠을 가지고 놀았다.


아이는 막대사탕을, 아니 사탕이란 것을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기에 그 맛있는 사탕이 맛 별로 한 다발이 있는데, 아이는 그것을 그저 인형이나 레고 블럭같은 장난감으로만 여겼다. 아이는 우리 집에 놀러오는 사람들에게 가끔 그것을 자랑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방문객들에게 '그거 먹는거라고 알려주지 말라'라는 조용한 지시 내지는 부탁을 했다. 

아이가 잠든 후 아이가 가지고 놀던 물건들을 정리할 때면 나와 남편은 츄파춥스 꽃다발을 자연스럽게 식료품 펜트리의 간식 칸으로 가져간다. 며칠 후 까까를 찾겠다며 식료품 펜트리를 뒤지던 아이가 막대사탕 꽃다발을 발견하면 까까를 찾던 중이었다는 사실도 잊고는 또 행복한 얼굴로 그것을 열심히 들고 다니다 놀이방에 가져다 놓는다. 이렇게 인식의 차이는 서로 다른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아이의 인생 통틀어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간식일 것이 분명한 막대사탕의 가치를 몰라 그저 예쁜 장난감으로만 여겨 먹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남편과 "얘가 이게 사탕인지 몰라서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복화술로 나즈막히 속삭이며 눈을 찡긋거리다가 문득, '나도 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그 가치를 모른 채 지나쳐버린, 내다버린, 썩혀버린 기회, 지식, 사람, 물건 등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맛있는 사탕을 손에 쥐고도 먹지 않고 들고만 다니는 이 아이처럼, 내가 살아오며 마주친, 그리고 앞으로 마주할 많은 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모른 채 바보처럼 엉뚱한 선택을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그러고도 난 내가 그런줄도 모르겠지 하는 생각을 하니 이내 마음이 무거워 졌다.


사탕 껍질을 한 꺼풀만 벗기면 온갖 달콤하고 맛있는 향을 맡을 수 있을텐데, 알록달록 예쁜 색들로 뒤섞인 실체를 발견할텐데, 그 얇은 비닐 한 겹으로 사탕의 본질은 철저히 가려져 있다. 사탕 포장지가 이것은 딸기맛, 이것은 콜라맛이라며 색과 그림과 글씨로 낱낱히 그 속성에 대한 정보를 주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아이에겐 그저 알록달록 예쁘고 작고 동글동글 귀여운 장난감이다.


아이의 무지를 바라보며 오래 전 TV 프로그램 '진품명품'과 골동품에 관한 여러 해외토픽이 떠올랐다. 안방에 그냥 평생 놓아둔 병풍이 알고보니 조선 후기 유명 화가의 작품이었다던지, 골동품 가게에서 단돈 몇 만원 주고 산 낡은 반지가 중세 시대에 제작된 다이아 반지였다거나, 야드 세일에서 구매한 도자기가 15세기 중국 황실에서 제작된 골동품이라던지 하는 등 사물의 가치를 몰라 홀대를 당하다 나중에야 극적으로 빛을 본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런 사건을 접할때면 우리는 '혹시 우리집에는, 내 물건 중에는 이런 골동품이 하나쯤 있지 않을까 하며 매일 보는 물건들도 며칠간은 예사로 보지 않았던 경험이 누구나 한 번 쯤은 있을 것이다. 오래되고 구식인 물건일 수록 그 골동품이 진품 또는 보물일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그런 물건은 일찌감치 버림받기에 집에 남아있을 확률은 반대로 낮아지는 것이다.


이런 보물 골동품은 우리 집에 없을까, 혹시 부모님 댁에는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던 중 츄파춥스 꽃다발을 들고 뛰어다니는 아이가 달려와 "이꼬, 이꼬(이거, 이거)" 하며 다발에서 탈출한 츄파춥스 하나를 내민다. 순간 나는 깨닫는다.


'여기 있었네.'


물건은 오래 될수록 가치가 올라가겠지만, 사람은 반대이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이 아이야말로 우주의 모든 가능성을 잠재한 보물이다. 사물의 가능성은 유한하지만 사람의 가능성은 무한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탕도 모르는 이 아이는 내가 감히 상상도 못한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감히 그 가치를 매길 수 조차 없는 가능성 그 자체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은 초등학교 시절 기행을 일삼고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멍청이'라는 평을 듣고 결국 3학년 때 퇴학당했지만 그의 가능성을 본 어머니의 전적인 믿음과 교육 지원으로 역사에 남을 업적을 남겼다. 만약 그의 어머니마저 그를 바보, 학습 지진아로 여겨 교육하려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달아 모든 것의 가치를 분별하는 혜안은 없을지언정, 내 아이의 가능성과 잠재력은 발견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할 것이다.


츄파춥스가 사탕인줄도 몰라 껍질을 벗겨볼 생각도 못하는 이 아이가 내가 가진 최고의 진품이고 명품이고 보물이다. 사랑과 믿음의 눈으로 자세히, 오래오래 바라보며 이 아이의 가치를 소풍날 보물찾기하듯 열정적으로 찾아보겠노라 다짐해본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인생 최고 난이도, 최장 플레이 타임의 무제한 보물찾기 게임이다.

작가의 이전글 03. 영감의 원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