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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라잎 Jun 10. 2021

05. 주도 본능

유아에게 발견되는 자기 주도성과 발달 과정에서 그것의 상실에 관한 고찰

아이가 20개월쯤 되니 말은 잘 못해도 모든 말은 다 알아듣기에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다 알아듣고, 좋고 싫음을 표현할 수 있으니 머리가 떨어져 나갈까 걱정이 될만큼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대거나, "아니!", "아니야~~"라고 너무나 단호한 거절을 하는게 문제라면 문제다. 어떤 때엔 차라리 이렇게 싫다고 정확히 의사표현을 해주는게 오히려 고마울정도로 나와 남편의 요청 사항을 다 이해하고도 마치 그 어떤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는 양 마이웨이를 시전하기도 한다.


나 자신도 호불호가 명확한 성격이고, 하기 싫은 일과 남이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사람인지라 나는 아이의 거부나 무시의 태도를 대하는 데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외출할 시간이 되어 "옷 입자" 할 때, 

목욕 시간이 되어 "이제 씻자" 할 때 처럼 

정해진 시간안에 꼭 해야만하는 일을 일단 완강히 거부하고 나설 때는 아무리 태평한 성정의 소유자인 나라도 순간 막막해지곤 한다. 억지로 붙잡고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겨 끌고 나가거나, 도망가는 아이를 붙잡아 옷을 벗기고 욕실로 끌고 들어갈 수는 없으니 결국은 목마른 사람이 회유책이란 것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20개월의 아이가 옷 입기 싫다, 씻기 싫다 고집을 부릴 때는 대개 긴박한 순간인 경우가 많은데, 병원 방문 등의 외출 시간이나 아이가 잠 잘 시간이 임박했을 때 등과 같은 것이다. 부모에게는 위기의 순간이나 다름 없다. 하나, 인간은 위기의 순간에 제 능력 이상의 것을 해낸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시간에 쫓긴 나머지 마치 초식 짐승이 포식자를 만났을 때와 유사한 위기 반응을 통해 가히 천재적인 회유책을 발견해 내었으니, 그것은 바로 현재까지의 내 경험 상 약 90% 이상의 성공률을 자랑하는 그 방법은 바로 “주도성 공략” 기법이다.


용어 그대로, 아이에게 무엇무엇을 해야한다고 '지시'하는 대신에 아이의 '주도성을 자극'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아이와 외출을 해야하는데 정작 아이는 옷 갈아입기도 귀찮은데다 현재 책 또는 장난감에 빠져 외출 준비를 할 마음이 전혀 없을 때, "00아, 지금 병원가야해. 빨리 옷입자"라고 '지시'하는 대신에,

"00아, 우리 지금 나갈건데 00이는 어떤 신발을 신지? 어떤 신발 신을지 골라줄래?"

"00아, 오늘 병원갈 때 어떤 친구(인형 또는 장난감)를 데려갈까? 오늘은 누구를 데리고 가줄거야? 친구들이 모두 '오늘은 나 좀 데려가줘!!' 하는데 00이는 어떤 친구를 고를거야?"

"00아, 이따 의사 선생님 만나면 아기상어 스티커 붙여주실텐데, 오늘은 어디에다 붙여달라고 할거야? 어디에 붙이는게 좋을까? 몇 개 붙여달라고 해볼까?"

이렇게 아이가 어떤 일을 주도적으로 선택 또는 결정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물론 논리라는 것을 장착한 성인 입장에서 봤을 땐, 일단 나간다는 자체를 싫다고 하는 이에게 '나가면서 000할래?', ‘나가서 이거 할 때 00할래?’하는 식의 제안이 얼핏 터무니없어 보이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실제로 완강히 외출을 거부하는 아이에게 이런 제안을 하게되면 아이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우 신이나서 행동하기 시작한다.


"00아, 목욕할 시간이야. 씻자"라고 '지시'했을 때 "아니야!!"하며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새끼마냥 목숨걸고 또 한 편 약올리듯 도망가는 아이에게,

"00아, 오늘은 어떤 친구(장난감)를 거품목욕 시켜줄까? 오늘은 공룡이를 씻겨줄래? 00이는 누구 씻겨주고 싶어? 얼른 골라와봐!"

라고 말하며 아이 주도적 상황을 만들어주면, 아이는 목욕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잰 발걸음을 즉시 고무딱지가 있는 놀이방으로 잽싸게 선회하여 잠시 후 '매우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하게' 딱지 중 몇 개(거품 목욕을 함께 할 친구의 수량도 본인 스스로 깊이 고민해서 결정하며 매일 다르다)를 선별하여 번개처럼 빠르게 욕실로 달려온다. 내가 아이를 목욕시키기 위해 할 일은 아이에게 소리치는 것도, 목욕하고 나면 곰젤리를 준다는 딜을 거는 것도, 발버둥치는 아이를 들쳐업고 욕실로 향하는 것도 아닌, 그저 아이가 오늘은 어떤 친구를 목욕시켜줄지 묻고는 욕실에 가서 기다리는 것 뿐이다. 놀랍지 않은가?


고작 한 살짜리 아이도 자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싫은가 보다. 인간으로 태어난지라 의지가 있고 선호가 있기 때문일테고, 비록 태어난지 2년도 안됐지만 인간의 본성은 아이나 성인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리라.

이와 관련하여, 개별 연구의 주제는 상이하지만, 영유아들이 학습되지 않은 주도성을 가지고 있음을 밝힌 연구를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Delafield-Butt & Trevarthen (2020)는 그들의 연구에서 유아들이 자발적인 움직임과 제스처를 통해 주위와 소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며, 정식 학습 없이도 주도적으로 행동한다고 주장했고, Stahl & Feigenson (2015)는 유아들이 정식 교육 없이도 스스로 탐구하려는 내재된 동기를 보여줌을 설명했으며, Shneidman et al. (2016)는 유아들이 주어진 교육적 상호작용이 없더라도 주도적으로 행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들 연구는 모두 아이들에게는 학습되지 않은, 그러니까 본능적인 ‘주도성’이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비록 20개월짜리 아이에게도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 않고 자기가 무언가를 주도한다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하고 신나는 일이다.

자기가 외출할 때 데려갈 인형을 깊은 고뇌 끝에 선택한 후 방을 나올때의 그 표정이,

자기가 오늘 외출할 때 신고 나갈 신발을 찬찬히 골라 현관 바닥에 탁 던져놓을 때의 그 표정이,

자기가 오늘 특별히 목욕시켜 줄 장난감 친구를 데려올 때의 그 표정이,

얼마나 만족스럽고 자신감 넘치고 의기양양한지 모른다.

'완벽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 사람이라면 이렇게 살아야지. 이 표정으로 사는게 맞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사회성, 직업, 환경, 상황 등의 다양한 이유를 들어 한 살짜리 아이에게서도 발견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인 ‘주도 본능’을 억누르고 외면한다.

남이 시키는 일을 그가 시키는 방식대로 하고, 자신의 마음이 원하지 않는 일을 머리로 떠안는다.

남들이 옳다고 하는 방향으로 가고 남들 보기에 좋은 것을 선택한다. 마치 내 인생을 내가 주도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은 지시에 순응과 복종하고 내 영혼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선택과 행동을 한다.


인간의 본능은 다스릴 수 있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는 매사에 주도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을 억누르고 외면하며 사느라 그 주도 본능을 발휘하기는 커녕 그것을 가졌다는 것 조차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

'아니야, 난 기질상 원래 주도적인 성향이 아닌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이가 주도성을 발휘할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보이는 소위 그  '완벽한' 표정을 짓는 '어른들'은 성격을 불문하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어른이 된 우리들은 어떤 이유로든 아이가 느끼는 것과 같은 그 '완벽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이의 그 '완벽한' 표정을 짓던 ‘어른들’을 본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들은,

남들이 다 미쳤다고 손가락질 해도 자기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업가

생애 첫 아르바이트 이후로 평생 남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겠다 다짐해 결국 평생 그 다짐대로 살고 있는 억만장자

그럭저럭 안정된 삶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삶을 살겠다 마음먹고 실천하는 행동가들

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정말이지 그들의 얼굴에는 보통의 '어른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그 '완벽한' 표정이 어린다.




오늘도 '의기양양'이라든가 '자신만만'이라는 단어로는 결코 표현되지 않는 그 ‘완벽한’ 표정을 짓는 내 아이를 보며 나는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생각해본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나도 아이와 함께, 아이 옆에서, 아이에게 그 ‘완벽한’ 표정을 짓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해본다. 물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게 살아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내 아이도 지금 가진 그 완벽한 표정을 쉽사리 잃게 되지는 않으리라.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이가 짓는 '완벽한' 표정을 보며 

내 자신의 상실된 또는 접어둔 본능을 깨닫는 과정이다.

그리고 아이의 그 ‘완벽한’ 표정을

오래오래 지켜주고자 다짐하는 일상의 연속이다.




[참고문헌]

Delafield-Butt,  J. & Trevarthen, C (2020) Infant Intentions: The role of agency in learning with affectionate companions. Encyclopedia of Teacher Education.

Shneidman, L. A, Gaskins, S., Woodward A. (2016) Child-directed teaching and social learning at 18 months of age: evidence from Yucatec Mayan and US infants. Developmental Science, 19(3), 372-381.

Stahl, A. E. & Feigenson L. (2015) Observing the unexpected enhances infants’ learning and exploration. Science, 348(6230), 9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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