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에 관한 감성적, 이론적 고찰
흔히들 아이를 낳고 키우면 삶이 바뀐다고 한다.
물론 나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던 한 인간이 나의 존재와 도움을 전적으로 필요로 하는 '자녀'라는 존재를 인생에 포함시키게 되면 생활 전반이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시간, 체력, 돈과 같이 인간이 가진 극히 유한하고 귀중한 핵심 자원을 한 대상에게 온전히 '갈아 넣는다'는 결심과 실행으로 아이 부모의 삶은 크게 바뀐다.
그런데 내가 아이를 키워보니, 나의 핵심 자원의 이동이나 투입 비율같은 물리적, 직접적 변화 이외에도 보다 고차원적이고 정신적인 변화가 발생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분명 '모성애'와는 다른 영역에 속한 그것을 나는 감히 '영감'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퇴근과 주말과 여름 휴가만 기다리며 소위 '편하고 좋은 회사'에 다니는 삶에 만족했던 내가 '좋은 회사를 다니는 엄마'가 아닌, '좋은 회사를 세우고 사회에 기여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져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창업을 준비한다.
주말이면 최대한 늦게까지 잠옷차림으로 뒹굴거리는 것을 한 주의 보상으로 여겼던 내가 '항상 나보다 일찍 일어나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는 엄마'가 되고 싶어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아이보다 한참 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상태로 아이가 몇 시에 잠에서 깨어나던 활기찬 모습으로 아이의 아침을 맞는 새벽형 인간이 되었다.
일하는 시간과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미드와 영화를 보는데 아낌없이 썼던 내가 '틈만 나면 독서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 돌연 독서광을 자처하며 살고 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무려 약 25년 전 영화인 잭 니콜슨 주연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의 명대사가 떠오른다. 사랑에 빠진 난봉꾼 잭 니콜슨이 상대인 헬렌 헌트에게 하는 말:
정말이지 아이는 내가 매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든다. 매일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미래를 꿈 꿀 것인지,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지...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영감을 불어넣는다.
며칠 전 신문에 실린 작고한 소설가 이청준에 대한 칼럼에 실린 내용은 이러했다. 육십 대의 나이에 늦둥이 초등학생 외동딸을 두고 있었던 그는 딸아이에게 세상 사는 이치와 옳고 그름을 판소리에 담긴 우화를 통해 가르치기 위해 판소리 동화 '심청가'를 집필했다. 판소리 심청가에는 여러 판본이 있지만 대부분 심청을 전생에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지상에 떨어진 선녀로 묘사하는데, 이청준은 신재효본을 차용해 심청을 연인을 찾으러 지상에 내려온 선녀로 해석했다 한다. 칼럼니스트는 '심청을 비극적 운명에 시달리는 여인이 아닌, 자기 결정권을 행사한 주체적 여인으로 그리려고 한 것은 긴 인생을 헤쳐 나가야 할 딸에게 희망적 서사를 들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라는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이런 사례가 바로 '아이가 주는 영감'이 예술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사례로서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의 일화도 있다. 저커버그는 2015년 그의 딸 맥스의 출생을 기념하며 딸에게 쓴 편지에 "네가 더 나은 세상에서 자라기를 바란다"며 그와 그의 부인이 보유한 페이스북 지분의 99%를 기부할 것이라 선언한 바 있다. 그의 딸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에게 그 어떠한 영감을 주지 않았더라면 그의 선택은 분명 달랐을 것이다.
이렇듯 아이로부터 받는 영감은 나라는 사람과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고,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돌아보는 마음의 눈을 뜨게 해준다.
그러고 보면 아이는 부모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 즉 뮤즈(muse)이다.
모든 창의적 영역에 있어 영감을 주는 존재를 ‘뮤즈(muse)’라고 한다.
뮤즈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예술, 학문, 음악, 시 등의 창조적 활동을 관장하는 9명의 여신들을 일컫는 말이다. 뮤즈는 제우스(Zeus)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Mnemosyne)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로, 창조적인 영감의 원천으로 여겨졌다. 이 여신들은 예술가와 학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창의적인 작품을 창작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져, 그리스인들은 모든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서 성공적인 성취를 이루기 위해 뮤즈에게 기도를 올리곤 했다. 이들은 시인, 음악가, 철학자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로, 창조적인 작업을 이끌고 성공적인 결과를 돕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예술가들은 자신이 영감을 받은 순간을 뮤즈가 찾아온 것이라고 여기며 뮤즈에게 영감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거나 의식을 올리기도 했다. 현대의 우리가 어떤 아이디어나 영감이 떠올랐을 때 ‘그 분이 오셨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러한 뮤즈는 오늘날까지도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표현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현대 예술가들도 종종 창의적 작업의 과정에서 특정 인물이나 아이디어를 '뮤즈'로 언급하며, 이는 그들이 작업하는 데 있어 영감을 제공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뮤즈는 예술 뿐만 아니라 학문과 철학, 과학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만큼 모든 영역에서 뮤즈, 즉 영감의 원천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렇게 쓰고 보면 얼핏 영감은 단순히 ‘무언가 번뜩이는 영감 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여길 수 있다. 하지만 2014년에 발표된 Thrash et al. (2010)의 연구에 따르면 영감은 아이디어의 제공 자체로 그치지 않고 창의적 프로세스 전반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연구자들은 다양한 심리적 실험을 통해 영감이 창의적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분석했는데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영감은 단순히 아이디어의 발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실제로 실행하려는 동기적 상태를 촉발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창의적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가는 과정에서 더 큰 동기를 보였다.
또한 영감은 처음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단계뿐만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실행 가능한 목표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는 영감이 창의적 작업의 초기 단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체 창작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실험 결과에 따르면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창의적 프로젝트를 더 오랫동안 지속할 가능성이 높았다. 영감은 작업의 중간에 동기가 떨어지거나 좌절할 수 있는 순간에도 지속적으로 창의적 에너지를 불어넣는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이는 영감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창의적 작업의 지속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보여 준다.
영감을 받은 창작자들은 일반적으로 창의적 성과가 더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에 따르면, 영감을 받은 작업은 품질이 더 높고 독창적인 경향이 있었으며, 대중으로부터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영감이 창의성의 질적 향상에도 기여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렇듯 영감은 최초 창의적 아이디어를 제공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 아이디어를 실행 가능한 목표로 구체화 하고, 궁극적으로는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도우며, 창의적 작업의 진행 중에 발생하는 문제 상황에도 지속적으로 창의적 작업을 유지하도록 에너지를 불어넣을 뿐 아니라, 창의성의 질적 향상에도 기여하는 엄청난 것이다.
나의 뮤즈인 나의 아이는 실로 내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존재이다. 나에게 보다 수준 높은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을 위해 행동하게 하며 그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창작자들의 기도 끝에 뮤즈가 내려왔듯, 현대의 아티스트들의 창의적 방황 속에 ‘그 분’이 오시듯, 내게 영감의 원천인 아이가 내 삶에 찾아왔다.
오늘도 나는 아이를 키우며, 아이가 매 순간 주는 영감으로 더 나은 인생을 만들어 간다.
[참고문헌]
Thrash, T. M., Maruskin, L. A., Cassidy, S. E., Fryer, J. W., Ryan, R. M. (2010) Mediating Between the Muse and the Masses: Inspiration and the Actualization of Creative Idea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8(3), 469-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