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09.
나의 변호사의 조언대로라면, 이혼 진행을 결정한 나는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야 마땅했다.
잠에 들면서부터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까지도 견고하기만 했던 나의 가출 결심은, 아이의 천진난만한 얼굴에 멈칫했고, 제 아빠와 함께 깔깔거리는 아이 웃음소리에 망설이다, "-빠! -빠!"하고 아빠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에 이내 무너져 내렸다. 며칠 동안 이 패턴이 반복되었다.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는 나의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빼앗기기에는 지나치게 좋은 아빠였다. 나는 그런 남편이 더욱 싫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 둘 다 하던가, 아니면 둘 다 말던가. 왜 그토록 좋은 아빠이면서 그토록 진저리 나는 남편이 되어 놔서 나를 이토록 괴롭게 하는지. 남편이 누군가에 의해 날 괴롭힐 목적으로 계획적으로 탄생하고 길러진 인간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잘못했어요. 다 잘못했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 좀 괴롭혀요. 나보고 어쩌라고?'
나는 분명 내 말을 듣고 있을 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과연 내가 그렇게도 잘못한 일이 많은지, 이토록 살아서 지옥을 경험할 만큼이나 큰 잘못을 한 게 있는지 진지하게 삶을 돌아보곤 했다. 아이와 남편 사이에서, 나는 지옥불에서 훨훨 타오르듯 괴로웠다. 그 마음의 고통은 내가 겪은 산통이나 출산의 고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아, 사람이 이렇게 괴롭다가 급기야는 미쳐버리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세상의 모든 미치광이들을 품어줄 수 있을 마음이 들만치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에게 '아프다'라는 형용사를 쓰는 것에 대해 나는 그제야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변호사에게 조정 신청서를 보내고도 아무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며칠을 더 고민하던 나는 마지막으로 남편과 대화를 시도하고자 했다. 내가 변호사를 만나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갑자기 아이를 빼앗길, 한편으로는 불쌍한 남편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남편과 내가 대화로 이혼 조건을 합의하면 조정이나 소송은 하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나도 남편에게서 아이를 강제로 빼앗고 기약 없이 아이를 못 보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평소보다 아이를 일찍 재워두고는 남편에게 우리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남편이 켜둔 TV 홈쇼핑 속 쇼호스트처럼 떠들어댔지만 역시 나에게 쇼호스트의 자질은 전혀 없었다. 남편은 나를 관심도 없는 물건을 팔러 늦은 시간 집까지 찾아온 악질 잡상인 취급을 하며 당장 물러가라 명했다. 내가 팔려는 게 자기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 줄도 모르는 바보 천치는 자신의 무지에 대한 벌을 받아야 마땅했다. 아이를 빼앗기고 고통 속에 몸부림을 치는 것이 그가 나를 잡상인 취급한 것에 대한 합당한 대가이리라. 나는 가슴에는 칼을 품고 쓴웃음을 지으며 그의 명대로 방으로 물러났다.
나는 밤새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수십 수백 번 머릿속으로 계획을 실행에 옮겨보았다. 나는 여느 주말처럼 아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남편에게 이유식을 먹여달라 부탁하고는 기저귀 가방을 싸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우리 아가, 맘마 먹고 함머니, 하버지 집 놀러 가자~~~~!!"
남편은 나의 속셈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아이와 까르르 웃어가며 아이에게 열심히 이유식을 먹이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 아이가 친정이나 시댁에 놀러 갈 때보다 훨씬 더 크게 짐을 꾸렸다. 기저귀도, 여벌 옷도, 장난감도 넉넉히 넣었다. 아이가 이유식을 다 먹자마자 나는 아이를 아기띠에 메고 큰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남편은 그저 내가 주말마다 그렇듯 친정에 놀러 가나보다 했다. 나는 그렇게 가출을 했고, 그때까지도 남편이 그것을 알아서는 안되었다.
나는 갑자기 주말에 자유를 얻은 남편이 어딘가로 외출해 주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일부러 남편에게 오늘은 친정에서 자고 간다고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친정과 지척거리에 살던 나는 초저녁 즈음 말도 없이 집을 찾았고, 나의 계획대로 남편은 집에 없었다. 나는 신속하게 짐을 쌌다. 시간과 내 체력이 뒷받침해 주는 한 최대한 많은 짐을 가지고 나오고자 했다. 특히 아이의 물건은 가구나 차에 실리지 않을 크기의 장난감들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물건을 수 차례에 걸쳐 옮겼다. 요령도 없이 막노동을 하느라 한겨울인데도 땀이 줄줄 흐르고 몸이 부서지는듯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을 조금도 남겨두고 나올 수는 없었다. 남편이 내가 아이를 데리고 가출한 것을 알게 된다면 홧김에라도 현관 비밀번호를 바꿀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는 찾지 않을 타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다 귀국하는 심정으로 알뜰히 짐을 쌌다. 마음만은 타국보다 먼 곳이 남편과 함께 살던 그 집이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이삿짐을 끌고 갈 수 있는 곳이 나에게는 친정뿐이었다. 어딜 다녀온다는 말도 없이 나갔다 한 참 후에 땀범벅이 된 채 도저히 눈뜨고는 못 봐줄 몰골을 하고 제 몸집보다 큰 보따리를 낑낑대며 들고 들어오는 딸을 본 부모님은 놀라움도 잠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듯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은 이내 아무 말 없이 짐을 집 안으로 옮겨주셨다. 아이는 하나 둘 들어오는 익숙한 자기 장난감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신이 나서 '꺄꺄' 소리를 냈고, 부모님과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집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결코 갈 곳 없는 짐들이 거실에 쌓여갔고, 한숨과 막막함이 먼지와 뒤섞여 온 집안을 부유했다.
그날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가출을 했다.
집에 들어왔다.
이상한 말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 집은 어디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