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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얼라잎 Dec 06. 2024

훨훨 날기 위해서는 족쇄에서 벗어나야 한다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08.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기 전, 이혼을 결심한 나는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의 결심을 공유했었다. 나의 선언에 이렇다 할 반대도, 그렇다고 강력한 지지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만 쉬는 그들에게 나는 아기 펭귄만큼이나 믿음직스럽게 그들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나는 이혼하면 훨훨, 높이높이 날아갈 거야. 두고 봐.”


저 높은 하늘을 목이 꺾여라 쳐다보며 아무리 그곳으로 날아가려고 날갯짓을 해도 결코 날 수 없게 날 붙들고 있는, 땅에 박힌 말뚝에 연결된 발목의 족쇄가 나에게 있어서는 바로 결혼이었다. 그 결혼은 내가 날갯짓을 할수록 발목에 엄청난 생채기를 냈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날갯짓을 계속하니 발목에는 뼈가 드러났다. 나는 흐르는 선홍색 피 너머로 드러난 하얀 발목뼈와 도무지 꿈쩍도 하지 않는 강철 족쇄를 바라보다 잠시 날갯짓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생각했다.

"어? 지금은 날갯짓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왜 이렇게 아프지?"


이런 나에게 이혼 결심이란 결코 두렵고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방과 희망에 가까웠다.

나는 저 높은 하늘의 구름에 닿을 만큼 높이 날 수 있는 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껏 당연히 누구보다도 높이 날 수 있는 새일 거라 믿으며 살아왔지만, 정작 그렇게 높이 날아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발에 족쇄가 채워져 아무리 노력해도 간신히 지붕 위까지만 오를 수 있는 나는, 지붕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아가고 싶다고 있는 힘껏 발악을 해보지만, 이 족쇄가 없다 해도 그 지붕 높이가 내가 오를 수 있는 최고 높이일지도 몰랐다. 날개는 있지만 펄럭거리기만 하다 얼마 못 가 땅으로 내려앉을 수밖에 없는 닭이나 오리 또는 타조 같은 것일지, 나는 제대로 날려는 시도를 해본 적이 없어 모른다. 하지만 행여 내가 날 수 없는 새일지언정 나는 일단 족쇄로부터 벗어나야만 한다. 그 족쇄는 나를 고통스럽게만 할 뿐 나에게 보호나 안식 따위를 제공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고통만을 주면서 나를 날지도 못하게 옥죄고 있는 족쇄를 풀어버림으로써 지금은 족쇄에 감추어진, 뼈가 드러나고 피범벅이 된 내 흉측한 발목을 기어코 만인 앞에 드러내는 수치를 당한다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이 끝을 알 수도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나는 족쇄를 풀고, 하늘로 훨훨 날아갈 것이다. 단순히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새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높이, 멀리까지 갈 것이다. 하늘을 나는 데는 날개만 필요할 것이므로, 내 발목에 뼈가 드러났건, 피칠갑이 되어있건 나의 비상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훨훨 날 수만 있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높이, 멀리, 빠르게, 오랫동안 나는지에만 관심을 보일 것이므로, 내 그로테스크한 발목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드시 훨훨 날아야만 한다.




이렇게 이윽고 깨닫고, 인정하고, 결심하고, 일말의 희망까지도 품은 나는 날이 밝아올 때까지 조정 신청서를 작성했다. 글로써 그간 내가 경험한 폭풍 같은 삶의 혼돈과 산사태 같은 마음의 붕괴와 천식발작 같은 숨막히는 괴로움을 표현하고 보니, 예상했던 대로 내가 그간 느낀 고통의 10분의 1도 표현되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글로 전달되지 않는 진심이 결코 거짓이거나 하잘것없는 것은 아니리라. 나는 분명 그동안 충분히 고통스러웠고, 미치기 직전까지 인내했으며, 머리가 터질 만큼 다방면으로 숙고했다. 밤을 새워 조정 신청서를 작성하느라 잠도 한숨 못 잤지만, 내 머릿속은 10시간 푹 자고 난 사람처럼 말끔하고 상쾌했다. 커피를 내린 후 거실 창으로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며 나는 결심을 굳혔다. 족쇄를 벗어버리고 훨훨 날아가겠다는 결심을, 이혼녀가 되어 혼자서 아이를 키울 결심을, 아이에게서 아빠를 빼앗은 죄인이 될 결심을. 머리는 그 결심으로 단단하고 맑았지만, 마음은 그 결심으로 아프다 못해 녹아 없어지는 듯했다.

나는 변호사 사무실 이메일로 그때까지 작성한 조정신청서를 첨부하고 본문을 썼다.


000입니다.

조정 신청서 보내드립니다.

최대한 빠르게 진행 부탁드립니다.


이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땅이 꺼질듯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 엄청나게 후련하면서도 미치도록 슬프고 시야가 흐려질 만큼 막막한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몰랐다. 그때 마침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침대방에서 아장아장 걸어 나오다 나를 발견하고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배시시 웃었다. 나는 아이에게 달려가 아이를 안아 들고 아이의 이름을 부르며 아침 인사를 해주려다 별안간 흐느껴 울었다. '잘 잤어? 좋은 아침!' 대신 미안하다는 말만 연신 해댔다. 아이가 내 목에 얼굴을 기댄 것인지, 내가 아이의 얼굴에 내 목을 파묻은 것인지 모르는 자세로 나는 한참 동안 아이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앞으로 평생, 이 아이에게 죄인으로서 사는 삶이 시작된,

참으로 '좋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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