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10.
나는 아이와 함께 집을 나왔고, 그렇게 비로소 싱글맘이 되었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삶을 나보다 더 간절히 바라온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남편이라는 적과 동침하며 내 목숨 같은 아이를 함께 키워야 하는 생지옥에서 나는 늘 이 아이를 함께 키우는 사람이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기를 바라왔다. 그리고 그 꿈은 자연스레 내가 아이만큼이나 끔찍이 사랑하는 친정 부모님과 함께 아이를 키우는 삶이 되었다. 친정집에 얹혀사는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의 삶을 그토록 간절히 바라고 꿈꿔 왔다니, 나는 이보다 더 슬픈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마트에서 대파 한 단을 사다주셔도 수고비까지 얹어 드리던 내가 부모님 댁에 얹혀사는 삶을 일 년 넘게 바라왔다니, 나는 또 이보다 더 모순적인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가 부모님께 빌붙어 사는 삶 자체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인간 동족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남편이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세 사람-엄마, 아빠, 아이-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행복할지 꿈꿔왔을 뿐이었다. 나는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 때 가장 행복하고 평온했다. 내 삶을 오롯이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 나는 세상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듯 느꼈다. 일순간 지옥에 떨어져 삶을 사는 동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원수와 한 집에서 지내야만 하는 형벌을 받고 있다 생각했다.
'벗어나야 해. 엄마, 아빠 품으로 돌아간다면 난 다시 그때처럼 행복해질 거야. 내 딸도 이런 지옥에서 벗어나 사랑 넘치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살게 해줘야 해. 그렇다면 내가 그랬듯 티 없이 해맑게 잘 자랄 거야. 그 어떤 화목한 가정의 아이처럼. 아니, 그보다도 더 잘.'
나는 아이가 태어나 돌이 지나도록 일 년 넘게 이 생각만을 품고 살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일 년을 되뇌던 생각을 실행에 옮겨 딸과 함께 친정집으로 돌아갔을 때, 부모님은 내가 결혼할 때보다 조금 더 늙으셨고, 기력은 훨씬 쇠하여 계셨다. 가출하여 친정으로 들어가자마자 나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회사에 복직을 했고, 나의 부모님은 출근하는 나 대신 그 힘들다는 돌쟁이 육아를 떠안으시게 되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비처럼 날아갔다 아이를 업은 빈대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큰 딸은 재택근무를 명목으로 아빠의 서재를 점령했고, 아기와 함께 잘 방이 필요하다며 고즈넉하고 널찍한 아빠의 침대방을 탈취했다. 엄마가 홀로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꾸며둔 가장 작은 방은 아빠의 침대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그간 치열하게 살다 아들, 딸 모두 결혼시키고 그제야 손주들 재롱이나 보며 노년을 즐기시려던, 70세를 바라보는 나의 부모님의 소중한 공간을 모두 쑥대밭으로 만든 나는 그렇게 이 시대 최고의 파렴치한으로 등극했다.
결혼 후 부모님으로부터 콩나물 한 봉지도 거저 받지 않으려 했던 독립심 넘치던 나는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에 매 순간 몸부림쳐야 했고, 그 괴로움을 최소화하고자 부모님이 아이 돌보기 이외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으시도록 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을, 얼마 전까지는 남편과 함께 나눠해도 힘에 부쳤던 그 모든 일들을 그때부터는 모두 나 혼자 해내야 했다.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출근해서 칼퇴를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하다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그제야 내 하루의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부랴부랴 아이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키고 그루밍을 마친 후 아이가 잠들기 전 마지막 우유를 먹이고 양치질을 해주고는, 잠들기 싫어서 자꾸 장난감을 꺼내드는 아이를 달래 방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면, 어둠 속에서 동요 메들리를 불러주며 가슴팍을 토닥거려 아이를 재웠다. 얼마 후 아이가 잠들고 나면 아이에게 축복 기도를 해주고, 행여 잠이 깰세라 더 깊은 잠이 들 때까지 조금 더 아이 옆을 지키다 방을 나오면 10시가 다 되어 갔다. 이윽고 아이방을 나온 내가 마주하는 풍경은 거실에서는 아빠가, 안방에서는 엄마가 하루종일 시달리던 육아에서 간신히 벗어나 초점 잃은 눈으로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시는 모습이었다. 모두가 지칠 대로 지친 그 밤의 무거운 공기가 내 마음을 무섭게 짓눌렀다. 나는 응당 건네야 마땅할 '미안하다, 감사하다, 오늘도 수고하셨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따위 말로 초주검이 된 부모님의 몸과 마음을 감히 위로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뱉지 못한 말이나 전하지 못한 마음에는 무게가 있는지, 그것들은 차곡차곡 내 안에 쌓여 하루하루 더욱 무거워지며 점차 내 영혼을 압박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면 가사노동이 시작됐다. 하루종일 따로 모아둔 아기 설거지(젖병, 물병, 이유식 식기)를 하고, 아이방 가습기를 모두 분해해 청소를 한 후 방에 세팅했다. 그리고는 온 집을 돌며 집 안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아이 장난감들을 모두 제자리에 정리했다. 그러고 나면 아이를 목욕시킨 직후 세탁기에 돌려 둔 아이 빨래가 건조까지 다 되었음을 알려 왔다. 아이 빨래를 개고, 분류해서 서랍 속에 넣은 후에는 잠시 소파에 앉아 스마트 폰으로 이유식 재료나 아이 간식들, 기저귀 등의 육아 용품 등을 검색하고 주문했다. 육아 쇼핑까지 마치면 그때서야 진정한 육퇴(육아 퇴근)가 가능했다. 드디어 육퇴를 하고 샤워를 하고 나면 그제야 자유 시간이 찾아왔다. 자유 시간이란 용어는 회사와 육아에 얽매이지 않는 시간으로, 본격적으로 창업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의미했다. 나는 아빠 서재에 틀어박혀 새벽까지 창업 준비를 하다, 너무 지쳐서 더 이상은 머리가 돌지 않는 시간이 되면 그때서야 겨우 내 몸뚱이 가로폭만 한 요가 매트를 좁은 서재 한 구석에 겨우 깔고 그 위에 엎드려 책을 읽기 시작했다. 독서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길 수 없었다. 너무 늦게 잠들면 새벽 달리기에 나설 때 무척이나 괴로워지기 때문이었다. 깊은 새벽, 아이가 자는 방으로 들어가 곤히 잠든 아이 옆에 요를 깔고 그새 부푼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수면잠옷을 입혔다. 그러고 나면 나는 그때서야, 드디어, 정말로, 잘 수 있었다. 너무나 피곤해서 눕자마자 곧장 깊은 잠에 빠져들 법도 한데, 칠흑 속에서도 낯선 아빠의 침대방 천장을 바라보노라면 집을 나와 친정에서 이혼을 준비하는 내 처지가 그제야 피부로 느껴졌다. 그러면 조금의 걱정과 적당한 각오, 남편에 대한 거센 분노와 혐오,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부모님과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내 뇌는 점차 각성 절차를 밟아 갔다.
‘안돼, 잘 시간이 얼마 없어.’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간신히 마음을 가다듬고, 나의 뇌에게 부디 각성을 취하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며 어렵사리 잠에 들곤 했다.
꿈에서도 염원하던 싱글맘스 라이프를 시작한 이후로, 나는 업무로 앉아있는 시간 외에는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여야만 했고, 싱글맘스 라이프만큼이나 소망하던 결혼 전 몸무게를 아주 가볍게 회복했으며, 하루에 네 시간 넘게 잠을 잔 날이 없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려야 했고,
최선을 다해 아이에게 회사 출근으로 인한 엄마의 빈자리뿐 아니라 아빠의 빈자리까지도 채워주어야 했으며,
최선을 다해 ‘성공한 싱글맘’이 되고자 끊임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사업을 일으켜야 했다.
나는 깨어있는 1분 1초도 쉴 수 없었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했다.
이렇게, 내가 1년을 하루처럼 꿈에 그리던 나의 싱글맘스 라이프는 상상했던 것보다 혹독했고, 기대 이상으로 괴로웠으며, 눈물 나게 외로웠을 뿐 아니라, 심히 고달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