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얼라잎 Dec 13. 2024

아이는 '아빠'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11.

나의 아이는 말이 무척이나 빠른 편이었다. 그런 나의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인 유려한  단어는 바로 '엄마'였다. 그리고 아이는 그녀의 생애 첫 단어를 선보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아빠'라는 후속작을 내놓았다. 그런데 아이가 한 번 '아빠'를 부르고 난 후부터는 한동안 '엄마'는 전혀 하지 않고 '아빠'라는 말만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엄마인 나를 찾거나 부르는 것이 명확한 맥락에서 조차 줄기차게 '아빠'를 불러댄 기간이 상당했을 만큼 아이는 '아빠'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런데 내가 아이와 함께 집을 나와 친정집 빌붙기살이를 시작한 이후 약 두 달이 넘어가도록 아이가 단 한 번도 '아빠'라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는 것이었다. 생각할수록 신기할 노릇이었다. 한참 말을 배우는 시기라, 며칠 간격으로 새로운 단어를 배워 말하고 또 정확히 반복 사용하여 우리 모두를 경탄하게 하던 아이가, 이전까지는 오히려 '엄마' 보다도 더 즐겨 말했던 '아빠'라는 말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이 사실을 인식했을 때는 당연히 아이 입장에서는 아빠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찾을 일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퍽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로 시간이 더 흘렀음에도 아이가 실수로라도 '아빠'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며 나는

'역시, 얘도 나만큼이나 자기 아빠가 싫었던 거야.'

하며 그저 속으로 씩 웃어넘겼다. 그렇게 아이에게 지극 정성을 쏟았던 남편이 아이에게서 잊혔다는 게 한편으로는 통쾌하기도 했다. 그렇게나 많은 단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아이가 '아빠'라는 말을 하지 않은 기간이 점차 길어지니, 나의 친정 부모님도 이것에 대해 무척이나 신기해하시기 시작했다. 딸의 이혼 난리통에도 꿋꿋이 거실 장식장 위에 세워둔 나의 결혼식 사진이 든 액자를 아이에게 내밀어 남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건 누구야?"

라고 아이에게 심심찮게 물으시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이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어설피 웃으며 입을 다물고는 못 들은 척을 했다. 그러면서도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며

"엄마 어디 있어?"

"아빠는 어디 있어?"

라는 질문에는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재깍 잘도 아빠를 짚어 냈으니 아빠의 존재 자체나 얼굴을 잊은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하지만 친정집 안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사진들 속의 남편 얼굴을 짚으며

"이건 누구야?"

라고 물을라 치면, 아이는 언제나 어색하게 웃으며 결코 '아빠'라는 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사진 속 아빠 얼굴을 가리키며 누군지 물었을 때 아이가 짓던 그 표정은 정말이지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을 만치 오묘했는데, 얼마간의 난처함과, 또 얼마간의 쓸쓸함이 마구 뒤섞인 느낌이었다.  


나는 가까운 몇몇 지인들에게 싱글맘으로 치열하게 살아내는 동시에 이혼 소송까지 준비하며 겪는 고충에 대해 토로하며 곧잘 이 '아이가 아빠라는 말을 하지 않는 신기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내 딴에는 적절한 시기에 아빠와 떨어뜨려 놓으니 애가 아빠를 자연스럽게 잊은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집 나와 아빠를 찾지 않는 아이가 무척 기특하기도 하여 들려준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아빠가 하도 안 보이니 아빠를 잊어버렸나 보다."

라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역시, 이래서 이혼을 하려면 아이가 어릴 때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라고 했다.

그중 나의 이혼을 초지일관 강력히 반대하면서도 너무나 강경한 나의 입장에 그저 항상 씁쓸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기만 하던 누군가는

"야! 걔가 아빠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눈치로 다 아는 거야! 넌 정말 걔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라고 나에게 버럭 소리치며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흐느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별안간 얻어맞듯 들은 호통에도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 겨우 돌에서 몇 개월 지났을 뿐인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얹혀살며 왜 '아빠'란 말을 실수로라도 입에 담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이유라 해도 가슴이 메인다. 하다못해 아이가 정말 아무런 이유 없이 그랬다 해도 나는 아이에게 그저 마냥 죄스럽다. 아이가 그렇게나 쉴 새 없이 찾아대던 아빠를 내가 내 손으로 아이에게서 떼어놓았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날 나는 내가 그간 꿈꿔왔던 자유롭고 당당한 싱글맘이 아닌, 평생 주눅 든 채 살아가는 죄인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