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결혼기념일에 이혼하기 12.
이혼을 위해 가출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회사에 복직하게 되었다. 일흔의 부모님께 하루종일 돌쟁이를 맡겨둘 염치가 없었던 나는 아이를 다만 몇 시간이라도 어린이집에 보내고자 했다.
어린이집에 등록하자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라 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아직 나와 남편이 혼인 상태이기에 등본에 함께 존재함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혼이 성립된 후에 이런 요청을 받게 된다면 얼마나 곤란할지에 대한 상상으로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이집에서는 또 원아 정보 중 가족관계 란에 아이 아빠 전화번호를 적으라 했다. 나의 변호사는 남편이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린이집에 있는 동안 아이를 데려가버릴 수도 있으니 남편에게 절대로 어린이집에 다닌다는 사실이나 어린이집명을 노출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만에 하나 어린이집 측에서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 남편에게 연락을 할 경우를 대비해서 전화번호란에 남동생 전화번호를 적었다. 놀랍게도, 나는 남편이 아이 어린이집을 알게 되는 두려움 보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는 줄도 모르는 남편이 전화를 받는다면 우리의 별거 사실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돌쟁이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다니게 된 어린이집의 첫 선생님에게만은 정말이지 들키고 싶지 않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변호사는 어린이집 측에 현재 이혼 소송이 진행 중임을 알리고, 그러니 아이 아빠가 와서 아이를 데려간다고 하면 절대 아이를 내어주지 말고 즉시 나한테 연락할 것에 대한 확답을 받아두라고 했다. 나는 그러마 대답했지만, 내 아이가 아침마다 품에 안겨 들어가는 선생님에게 도무지 그 엄청난 이야기를 할 엄두가 나지를 않아 관두었다.
어린이집에서는 아이들의 활동 자료로 심심찮게 ‘엄마, 아빠와 함께 찍은 사진’을 제출하라 했고,
아이가 매일 빠짐없이 들르는 참새 방앗간인 아파트 놀이터에 갈 때면 엄마, 아빠와 함께 나와 신나게 뛰어놀며 깔깔대는 가족들이 우리 옆에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고통스러웠다. 나의 아이는 그네를 타면서도 미끄럼틀에서 내려오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을 번쩍번쩍 안아 올리는 다른 아빠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혹여나 아이가 아빠를 찾을세라 몸이 부서져라 다른 아빠들보다 더 높이, 더 오래, 더 많이 안아 올려주었다. 덕분에 고맙게도 나는 점점 날씬해져 갔다.
아빠의 생신 기념으로 동생네 가족과 함께 부모님을 모시고 간 가족여행에서도 나는 아이와 단둘이서 인피니티 풀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둘이서만 사진을 찍어야 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아이를 태운 튜브를 끌어주어야 했다. 나의 아이와 같은 나이의 조카를 둔 내 남동생 부부는 행여나 나 혼자서 힘들지는 않을까, 서럽지는 않을까 하여 2박 3일 내내 나의 눈치를 보며 자신의 아이보다 나의 딸을 더 많이 안아주고 챙겨주었고, 여행의 주인공인 나의 아빠는 손녀에게 아이 아빠처럼 쉴 새 없이 봉사했다. 내가 아무리 온몸의 근육과 관절을 전방위로 활용하고, 내 모든 기운을 아낌없이 다 쏟아부으며 부산을 떨어대도, 아빠와 엄마 두 사람 몫을 모두 다 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박 3일간의 여행을 마치며, 나와 내 딸은 존재만으로도 가족들에게 짐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친자매와 다름없는 사촌 언니와 사촌 여동생과의 단체 대화방에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로 시답잖은 소리를 아무렇게나 해대다가, 평소라면 키득거리며 웃어넘기거나 날래게 되받아칠만한 조소나 비아냥을 들었을 때 나는 이들이 내가 이혼녀라 나를 우습게 본다는 생각으로 분노했다. 분노로 씩씩거리던 나는 이내 내가 그동안 남편의 고질병이라고 부르짖던 '피해망상증'이 이제는 나의 병명이 되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렇듯 편부모 가정의 가장인 싱글맘에게는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가혹하다 못해 폭력적이었다.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없는데 피해자만 존재했다.
당시 나의 친한 친구에게는 6살 난 아들이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 전부터 줄곧 해외 건설 현장에서 근무를 했고, 일 년에 네 번씩 한 번에 2주 동안만 한국에서 휴가를 보냈다. 친구의 아들도 역시 매일같이 놀이터에서 노는데, 놀이터에서 아빠와 함께 노는 친구들을 볼 때면 어김없이,
"나도 아빠 있는데... 나도 아빠 있잖아, 그치 엄마?"
이 말을 계속 반복한다고 했다. 나의 친구는 그 계속된 물음이 말이 느린 자신의 아들에게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에게는 분명 아빠가 있는데 왜 함께 놀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문,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빠라는 존재가 분명히 있기는 한 것인지에 대한 확인, 매번 친구들 중 자기만 아빠 없이 엄마와만 놀아야 하는 것에 대한 서러움 등이 한데 뒤섞인 물음이라는 것이었다. 나보다 한참 먼저 결혼한 나의 친구가 남편 없이 혼자서 결혼을 준비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것에 대해 항상 안쓰러워했던 나는, 그녀의 아들이 커갈수록 그 마음의 몇 배가 되는 안타까움을 그 아이에게 느꼈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싱글맘을 자처함으로써 나의 딸에게 친구 아들과 비슷한 상황을 기어코 물려주고 나니, 나는 딸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선 애달픔으로 가슴 깊은 곳이 아려옴을 느꼈다. 나의 딸도 좀 더 크면 친구의 아이처럼, 수많은 감정이 엉망으로 뒤섞인 질문을 하게 되려나 생각하다, 혹시나 나의 아이는 그런 말조차도 못 하고 아빠와 살지 않는다는 걸 숨기며 태연하게 아빠와 함께 사는 척하며 지내면 어쩌지 하는 상상이 머리를 스치자, 억장이 무너졌다. 와르르, 내 세상이 무너졌다.
이혼이라는 것이 정답이건 아니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피치 못할 일이든 또 그렇지 않든 그 선택과 책임은 철저히 나와 남편의 몫이라 믿어 왔었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나의 아이가 지금부터, 그리고 점점 자라 가며 겪고 마주해야 할 가혹한 일들과, 끔찍이도 외로울 날들과, 그것들로 인한 상처에는 누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 만 1살짜리가 잠깐 어린이집에 다니는 동안에도 이렇게 걸리는 것이 많은데, 앞으로는 어떨까?
남편과의 이혼을 결심하고 집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혼녀'가 되고, 이혼녀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막상 예비 싱글맘이 되고 보니, 내가 이혼녀가 된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빠 없이, 평생을 엄마와 단 둘이만 살아가게 될 아이의 삶을 그려보면 내가 이혼녀, 싱글맘이 되는 건 정말이지 고통이나 시련의 축에 들지도 못했다.
나는 앞으로 이 아이에게 아빠의 빈자리를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진 아빠라는 존재의 부재를 나는 언제,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 속의 어느 시점에 그 부재에 대해 설명을 시작할 것이며, 설명하는 것에서 이해를 시키는 것으로, 이해를 시키는 것에서 양해를 구하는 것으로, 양해를 구하는 것을 넘어 용서를 비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지 아득하고 막막하기만 했다.
싱글맘의 삶을 꿈에서도 애타게 부르짖으며 기어코 이혼 소송을 감행한 내가,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분노, 죄책감, 회한, 두려움, 미안함, 증오, 원망, 열등감, 피해의식 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낄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것이 아이를 두고 하는 이혼 소송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이혼 후의 나의 삶이 두렵지가 않았다. 이혼 후에 달라질 아이의 삶과 그 삶을 살아 낼 아이, 그리고 그 아이를 키우며 아이의 아픔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 사지가 떨릴만치 두려웠다. 아이가 살아 낼 그 삶이 혹시 고통이나 외로움, 원망, 비교로 인한 피해의식 등과 같이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지는 않을까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자식을 둔 부모에게 그보다 더 큰 두려움이 있을까.
이제 시작인데, 얼마나 더 가혹한 일들이 나와 내 아이 앞에 펼쳐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심해에 던져진 채 가야 할 곳을 잃은 느낌이었다. 이러한 상념에 잠겨있다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꿈에서도 역시 나는 바다 깊은 곳에 홀로 외롭게 던져져 있었다. 깊은 바닷속의 기온 때문인지 깜깜함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인지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한 편 사무치게 외로웠다. 어디로든 몸을 움직이려는데 내 어깨 위에 목말을 탄 아이가 나를 무겁게 짓누르며 다리로는 목을 조여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닷속에서 나는 일단 물 위로 올라가려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허사였다. 내가 죽는 것은 괜찮은데 아이는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헤엄을 치는데 물속 저 쪽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며 무언가를 찾는 듯 바닷속을 헤매는 사람의 모습이 어렴풋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깊은 바닷속에서 치는 헤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게 헤엄치며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흡사 미친 사람 같았다. 미친 물고기라고 해야 하나. 정신없이 이리저리 헤엄치던 그 사람이 급기야 우리 쪽으로 가까이 왔다. 점차 가까워진 그 사람의 얼굴이 조금씩 드러났다. 남편이었다. 그는 내 어깨에 올라탄 아이를 발견하고는 물속에서도 환하게 웃었다. 나는 남편이 그 캄캄한 물속에서 아이를 찾고 있었나 보다 생각했다. 아이를 발견한 남편은 얼른 아이를 내게서 받아 들었다. 다리로 목을 조르던 아이가 남편에게 안기니 나는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남편 품에 안긴 아이는 칠흑 같은 바닷속을 밝히며 환하게 웃었다. 마침내 만난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고, 그제야 숨통이 트여 숨을 몰아쉬던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바닷속에서 엉엉 울었다.
분명 꿈이었는데도, 눈물이 바닷물보다 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