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집에만 있기엔 아까운 날이었다. 그 결심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맹렬히도 울어대던 매미의 자리가 잔잔한 귀뚜라미로 대체되면서 계절의 길목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 해도 나지 않는다고 해서 외출하기에는 절호의 찬스였다. 하지만 비 소식도 들렸다. 비가 와봐야 얼마나 올까 싶어서 짐스러운 우산은 하나만 챙겼다.
오늘 만큼은 도서관도 가지 않고, 아내가 하자는 대로 동네 구경 겸 소품 쇼핑을 위해서 서울 종로로 향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종로에서는 특별히 뭘 하지 않고 그저 걷기만 해도 볼거리가 넘쳐난다. 슈퍼마리오 게임에서 마리오가 코인을 획득하기 위해 코인에 살짝 점프만 해도 포인트를 얻는 그런 기분이랄까.
하늘 빛깔은 꾸물거려서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지만, 덕분에 해가 나지 않아서 체감 온도는 괜찮았다. 아내가 일순위로 알아둔 경복궁 인근 삼계탕 식당은 오늘이 하필 말복인 관계로 10시 반에 갔는데도 이미 예약이 꽉 찼다. 1시간 이상을 기다려 식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언제부터 제철 음식을 그리도 챙겨 먹었다고’하면서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아내가 혹시 몰라서 이순위로 알아둔 삼청공원 네거리에 있는 식당으로 가기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우리 밖에 없는 한정식 식당에서 여유를 느끼며 식사를 하는데, 때마침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아차’ 싶었다. 식사를 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유리창 밖으로 향했다. 떨어지는 빗줄기의 강도를 보니 사그라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우산 하나로 동네를 산책하기에는 옷과 신발이 젖을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 찬을 날라주던 식당 주인 분의 눈치를 보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저, 혹시 명함과 신분증을 맡길 테니, 우산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남은 우산이 있나 한번 볼게요.”
계산을 하고 나서는데 우산을 내게 건네주었다.
“신분증 드릴게요.”
“아니에요. 됐어요.”
“제가 안 가져다드리면 어쩌시려고 그러세요?”
“할 수 없죠. 근데 안 그러실 거 같은데요.”
오고가는 대화나 빙긋이 웃는 주인 얼굴에서 식당 상호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우산이 두 개가 되긴 했지만 막상 동네 구경과 쇼핑을 하러 가기에는 거리도 있었고 어설펐다. 일단 비를 피할 곳부터 찾았다. 식당 인근에 예전에 갔던 ‘삼청공원 숲속도서관’이 생각나서 일단 그곳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도서관만큼은 오늘 하루 패스하려고 아내와 의기투합 했는데, 주말마다 찾는 도서관이 오늘도 예외를 주지 않았다. 중국집 쿠폰에 스티커를 하나씩 붙여나가듯 오늘도 거르지 않아서 외려 내겐 다행스런 마음도 들었다.
읽던 책을 잠시 덮어두고 도서관의 넓다란 창밖으로 시선이 고정 되었다. 나뭇잎 색을 한층 진하게 연출하는 비는 그야말로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잎사귀에 모였다가 또르륵하며 흘러내리는 모습은 마치 여름과 가을을 마주잡고 있는 빗방울의 왈츠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활자에 몰입하다 보니 비가 그친 것을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진한 풀냄새가 사방을 휘감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인정어린 삼청동 우산과 작별할 시간이 다가왔다. 맛도 맛이지만 나를 편하게 해준 식당은 ‘인심까지 맛집’이었다. 반찬들도 슴슴하고 정갈해서 내 입맛에는 합격이었다. 아까 식사할 때만해도 이른 시간이라 손님은 우리만 있었는데. 우산을 반납하러 갔더니 다른 손님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분주하게 반찬을 나르던 주인 분은 아까 그 미소를 내게 또 한 번 지어 보였다.
하늘은 점점 갤 모양이었다. 소박하고 따스한 인심이 촉촉한 단비처럼 내 마음을 적시고 살며시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