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사정으로 우리 세 식구는 잠시 사글세로 지냈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작은 마당이 있는 문간방이었다. 그 단칸방엔 단촐한 세간 살림살이가 방을 옹색하게 채웠다. 비키니 옷장, 초미니 냉장고, 흑백 텔레비전, 밥솥, 그리고 접이식 탁자......하필 주인 아들이 나랑 같은 학교 다니며 가끔 보던 친구였는데, 우리 형편을 들여다 볼까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따로 있었다.
그 집엔 유독 계단이 많았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깊숙한 아래 마당까지 내려가는 계단이 바로 있었다. 또 옛날에 지어진 대부분 양옥이 그랬듯 공용 화장실 겸 창고로 쓰는 곳이 마당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화장실 위로 올라가려면 또 다른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그렇게 올라간 계단 끝에 서면 좁다란 슬래브 지붕에 장독 대여섯 개가 있었고 빨래들이 볕에 몸을 너울거리고 있었다.
나에게는 여러모로 불편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주택이었다. 출입문을 지나면 마당까지 이어지는 계단이 초등학생이 내딛기에는 제법 경사가 있었다. 또 어머니 부탁으로 빨래를 걷어 올 때면 공용 화장실 위로 올라가는 계단도 내겐 만만치 않았다. 특히 계단은 모두 폭이 좁았고 난간도 없었다. 주인도 지금껏 그렇게 살았는데 잠시 머물다 떠날 세입자 주제에 무슨 염치로 난간대 따위를 요구한단 말인가.
그 중에서도 제일 곤혹스러웠던 점은 눈이 올 때였다. 마당은 둘째 치고 계단부터 얼른 눈을 치워야 했다. 일단 계단에서 마당으로 쓸어내리고 마당의 눈을 마지막으로 정리했다. 그것이 맞는 순서였다. 하지만 마당에는 더 이상 어디로도 처리할 데가 없는 눈덩이로 남곤 했는데 그런 눈이 쌓이고 또 쌓여 오고가며 눈에 밟혔다.
마당 수돗가는 연례행사처럼 자주 얼어터지곤 했다. 작동이 시원찮던 초미니 냉장고는 코가 삐뚤어지고 귀가 달아날 정도의 한파가 몰아닥치면 겨우내 임시 휴무였다. 반찬통을 꼭 닫아 가지런히 마루에 내다 놓으면 해결이었다. 우리 가족은 재수가 없으려고 그랬는지 일 년여를 머물면서도 하필 두 번의 혹독한 겨울을 났다. 지금의 추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 모든 의식주의 부실함이 이런 각인된 감각을 여태껏 남게 했으리라.
세월이 지나고 그 동네에 작은 양옥을 지었다. 순전히 부모님이 내게 보여준 억척스러움의 결정체라고 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당시 중동 발 석유 파동이 가져다 준 절호의 기회였다. 그 새집에서의 설렘은 옥상을 올라가는 순간 당황스러움으로 바뀌곤 했다. 우리 집 옥상엔 아주 야트막한 턱이 있었으나 난간대가 따로 없었다. 최소한의 경비로 아끼고 아껴서 짓다 보니 그랬다고 들었다. 사글세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옥상에만 올라가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무척 불안했다. 가장자리 쪽으로는 아찔해서 다가가기가 무서웠다.
그러다가 형편이 풀려 난간대를 설치했다. 그 때 난간대를 잡고 느꼈던 뿌듯한 안도감이란......나의 안전을 담보해준 아버지를 보고 환하게 웃음지어 보였다. 부모님의 품처럼 따스함이 묻어나는 공간이 되었다. 넓진 않지만 끝에서 끝으로 달려 보기도 하고, 여름엔 난간 사이에 끈을 묶고 비닐을 고정시켜 그 안에서 밤을 지새우며 하늘의 별도 마음에 담아보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스테인리스보다 저렴하다는 이유로 그 난간대를 철제 재질로 설치했다. 나는 몇 년에 한 번씩 아버지와 페인트를 덧칠해야 했다. 집안의 크고 작은 보수는 당신이 직접 하였다. 하지만 녹이 슬어 부식되는 건 생각보다 진행 속도가 빨랐다. 나는 때마다 페인트를 칠하면서 난간이 없던 아찔함을 생각하며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오래 버텨 주기만을 바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난간대 일부가 거의 바스라지는 수준이 되어서 더는 칠을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게 되었다. 난간 전체가 동시에 휘청거리기도 했다. 옥상에서 동네를 바라보면 다들 스테인리스로 된 난간대들이 각자의 옥상에서 자태를 뽐내듯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동안의 세월을 같이 했던 난간대도 철거하였다. 힘없이 옥상 난간에서 뽑히고 녹으로 생긴 가루가 수북했다. 작업인부의 손에서 쉬이 부러지는 모습에서 아버지와 함께했던 지난 세월이 머리를 스쳐갔다. 나는 그 난간을 내 삶의 울타리 삼아 아버지의 품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안락함을 누렸을지 모른다.
생전의 아버지는 담장도 쌓았다. 뒷집과의 끝없는 다툼이 원인이었다. 건물 뒤편에 살던 분은 우리 집 쪽으로 물건을 마치 자기 집인 냥 산더미처럼 쌓아 두었다. 오물도 투척하고 갖가지 만행도 일삼았다. 아버지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걸 곁에서 지켜본 나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가족만을 위해 모든 것이 막힌 담장처럼 막아 내야만 하는 수호신이었다. 어렵사리 측량을 하고 담장을 설치하던 그날까지 뒷집은 아버지에게 온갖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 아버지가 직접 조적하고 시멘트로 마무리한 그 거친 면을 쓰다듬을 때마다 목이 메이곤 했다.
작고하신 아버지를 대신에서 그 건물을 내가 관리하는 동안에도 크고 작은 애환을 느꼈다. 그때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다. 가족이 힘겨울까봐 미리 온 몸으로 큰 울타리처럼 막고 섰던 아버지는 담장 하나만을 남긴 채 더 이상 내 곁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