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장례식

by 윤슬

할머니는 나에게 커다란 세계였다. 시대를 넘나드는.


1918년생이었던 할머니는 2018년에 작고 하셨다. 어린시절 빨래감이 있으면 동네 앞 개천에 나가 빨래를 하고, 가마솥을 떼워 밥을 짓고, 각종 장(고추장, 된장, 막장, 간장 등)을 집에서 담그며 농사까지 지었다. 하다못해 집안에 냉장고며 세탁기며 밥솥이며, 남들 가진 가전제품이 집에 없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한때는 초등학교때 그걸로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할매는 주민등록상 1918년생이었고, 실상 이전에 태어났다. 훈장이었던 외조부의 딸로 태어나 차별을 받고 자식이 많았던 터라 몇년 안에 죽을 수도 있으니 따로 태생 등록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일제 강점기의 적히지 않은 역사들과 사건들을 시작으로 근현대사의 여러 일들을 고스란히 들으며 자랐다.


오늘 글은 그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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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갔던 6월 말이었다. 한창 더워지기 시작한 즈음, 새벽 술집 청소를 하고 도서실에서 잠시 자고 있던 나에게 부친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부 전화거나 친인척들의 행사 연락이겠거니하고 무시했다. 이후 두 차례나 연이어 연락이 왔다.


친인척들과 관계를 개인적으로 끊은 상태라 딱히 부친의 연달은 연락이 달갑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부친과의 관계가 좋진 않았다. 평창 올림픽 쇼트랙 경기가 한창이던, 구정 즈음 2018년 2월에도 친척들 앞에서 부친과 한바탕 했던 이유도 있었으니까. 한두달에 한번 연락을 할까 말까였던 연락이었고 독서실에 있던 난 그저 부재중 알람만 발송했다.


얼마 후 문자가 왔다.


"할머니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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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을 받기 불과 한두 달 전까지도 무슨일이 있어도 이주에 한번은 할머니를 뵈러 갔다. 요양병원에 가기 전, 몇달 간 내가 불식간 집에 갔을 때, 할머니는 벽에 똥칠을 하고 계셨다. 민망함 너머 수치심이 들 정도로 손자에게 맨몸으로 씻겨지는 기분을 난 헤아릴 수는 없다. 어쩌다 할머니 혹은 집이 그리워 내려가는 날이면, 수챗구멍에서 음식물을 빼내어 그걸 드시는 모습, 옷에 뭍은 잔뇨와 잔변이 있어 온 집이 퀘퀘한 냄새가나지만 먼지가 많다하며 환기를 시켰던 기억, 두 눈이 안 보였기에 이리저리 쌓이고 잔반이 남겨진 그릇과 식탁 그리고 바닥을 치웠던 나날이었다. 어느날인가 노인네가 앉았던 자리에 잔변과 잔뇨가 있던 걸 확인한 뒤로 '딸인 고모들에게 도움을 청하는게 좋지 않겠냐'며 부친에게 이야기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한동안은 그 빨래감을 삶고 빨고 치우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따라 고향집에 내려가고 싶었다. 집에 가기전에는 항상 집에 전화로 노인네에게 전화를 걸고 집에 계신지 확인하고는 부친에게도 전화를 걸어 내려가곤 했었는데, 그날따라 그냥 가고 싶었다. 마침 일정도 일찍 끝난 오후였고, 급작스레 터미널로 가면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향 터미널에 도착해서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받지 않길래 느낌이 좋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바로 집으로 향했고,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할머니가 창문 너머로 보이지 않는 눈으로 하염 없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았다. 할매는 강인해 보이는 사람이다. 눈물을 보여도 그렇게까지 보이는 일은 없었다. 앞이 보이지도, 귀가 잘 들리지도 않는 백세 넘은 노인네에게,


"할머니 나 왔어"라고 했더니


"00이 왔냐??"라고 했다.


동생의 이름이었다.


나라고 하자,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눈물을 훔치고는 정색에 가까운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개인적인 일로 할머니와도 부친과도 꽤 크게 부딪친 적이 있었기에 감정은 좋지 않지만, 그저 그러겠거니 싶었다. 손을 씻을겸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화장실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내색을 하지 않고 천천히 청소를 했다. 2-30분쯤 흘렀을까. 락스 향에 찌들어 환기를 시킬겸 화장실 문을 열자 할매가 있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나에게 '미안하다'라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괜찮아, 라며 할머니를 설득했다. 욕실로 모시고 몸을 씻겨 드렸다. 생전 등을 밀어 드렸던 어린 시절은 있었지만, 온 몸을 씻기며 여기저기 뭍은 분을 벗기는 내내 더럽다기 보다는 화가났다. 고모들이라는 사람들이, 자식이라는 새끼들이 돈만 보내면 되는 줄 아는 그 상황이, 30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구나라는 분함이 솟구쳤다.


목욕을 하고, 인숙씨가 좋아하는 믹스 커피를 타다 드렸다. 할머니와 텃마루에서 혹은 김장독에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며 누워 있으면 햇살이 비추던 그 어린날이 참 좋았기에,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거실에 난 눕고 소파에 앉은 할매와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었다. 혹시 몰라 녹음을 했지만, 그 기기는 현재 없고 그때의 감정과 그때의 기억, 느낌, 추억만이 지금 남아있다.


느낌이 좋지 않아 일하고 있던 곳에 이야길 하고 한 주 쉬기로 했다. 그리고 이틀 뒤, 할머니는 집 앞에서 넘어 지셨고, 왼쪽 전완근 위쪽 상피가 전부 벗겨지는 부상을 입는다. 그게, 그녀와 '집'에 있던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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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씨가 돌아가셨다.


부친이 독서실에 있던 나에게 전화를 여러 차례 전활 걸어 '할머니 돌아 가셨다'라는 말 뒤에, '너 할머니와 찍은 사진 있니?' '할머니 모습 기억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의아했다. '당연하지. 사진도 있고 기억하지. 왜?'


'할머니 영정사진이 없다'


요새야 ai가 있어 세밀한 프롬프트를 작성해 이미지화 시킬수 있지만 그땐 그렇지 못했다. 다행히 할머니가 가끔 이야기 하셔서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을 옷장 밑칸 맨 아래에 둔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덕분에 영정사진을 그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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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네의 부고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장례식장으로 갔다. 밤 9시였다. 들어가자마자 고모 두 명이 영정사진 옆에 있었고, 신발을 던지다시피하며 들어가자마자 할머니에게 절했다. 고모들은 혀를 끌끌 차며, 교회를 다녔던 놈이 무슨 절이냐며 나무랐다. 속으로 너무 화가났다. 자기네가 그토록 나에게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한 가족(주의)에 대한 이야기에 반하는 이야기니까. 두번째 절을 올리는데 '어머머머, 쟤봐 언니'라는 이야기와 '교회를 다닌다는 놈이 무슨 일이야 어머'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두번의 절을 끝내고 고모들을 마주하고는, 목례를 하고 집안 사람들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고모들만 다섯명이었던 난, 자리에 앉자마자 할머니에게 절했다는 이유로 후레 자식이 된, 대표적인 개독교 집안의 손주가 되어 있었다.


육개장을 받아 한술 뜨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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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할머니한테 절한게 잘못한거에요?"


벼르고 있던 그 3일이 나의 면전에 다가오던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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