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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주 Oct 13. 2024

조언인가 간섭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조언을 듣는다. "그렇게 하면 좋아."라는 친절한 말부터 "이건 이렇게 해야지!"라는 약간의 명령어투까지, 조언은 곳곳에 넘쳐난다. 나는 조언을 받는 순간, 잠시 머릿속에서 계산을 시작한다. 이 말이 정말 나를 위한 걸까? 아니면 나를 통제하려는 간섭일까? 뭐, 처음엔 그저 고마운 조언처럼 들리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마음속에서 그 말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해석하는 데 몰두하게 된다.

조언과 간섭의 경계는 늘 애매하다. 사실 그 경계는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 같다. 기분이 좋을 때는 "오, 이 사람 나를 위해 말해주네."라고 고맙게 여기지만, 피곤하거나 마음이 예민할 때는 다르다. "왜 자꾸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라고 내 마음속에서 갑자기 반발심이 솟아오른다. 그러면 그 조언은 더 이상 조언이 아니다. 그때부터는 간섭이 되어 나를 억누르고, 나는 그 말에 묶여버린다. 결국,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나의 마음 상태인 셈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 아이가 편식할 때 누군가가 "아이에게 채소를 좀 더 주는 게 좋을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게 나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미 아이의 식단에 대해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면, 그 말은 전혀 다르게 들린다. "그래, 내가 무능해서 아이에게 채소도 못 먹이고 있어." 이런 억측이 머릿속에서 자라기 시작하고, 어느새 그 작은 조언은 간섭처럼 느껴진다. 나는 상상 속에서 그들의 의도를 재구성하고, 그 의도가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게 바로 억측의 시작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나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있을까? 아니, 그들은 나보다도 자신의 삶에 더 관심이 많을 거다. 그저 지나가는 조언이었을 뿐인데, 나는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그 말을 커다란 간섭으로 키워낸다. 그리고는 그 말이 나를 통제하려고 한다는 억측 속에서 혼자 상처받는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우스운지, 이제 와서 보면 그때의 나는 괜히 복잡하게 생각했구나 싶다.


여기서 중요한 깨달음이 있다. 타인이 던진 말이 나를 간섭으로 옥죄느냐, 아니면 조언으로 나를 돕느냐는 전적으로 내 해석에 달려 있다. 그들의 의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하다. 조언으로 받아들이면, 그 말은 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반대로 간섭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그 말에 불편함을 느끼고 괴로워진다. 그러니 결국 그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다.


사실 조언이든 간섭이든, 내가 선택한 대로 그 말은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 말이 나를 묶는 족쇄가 될 수도 있고,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말로 넘길 수도 있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더 가볍게 살기로 했다. 그들이 나에게 던진 말에 대해 너무 깊이 고민하지 않으려고 한다. 중요한 건 그들의 말이 아니라, 내 삶이니까. 그 말들이 내 삶을 바꿀 수는 없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내 인생의 주도권을 지키면 되는 거다.


이제는 타인의 조언을 조금 더 느긋하게 받아들여 보려고 한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나는 그 말속에 숨겨진 의도를 파헤치기보다, 그저 한 번 미소 지으며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은 그 조언을 들으며 "아, 또 하나의 스토리가 생겼군." 하고 웃어 넘기기도 한다. 인생은 복잡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 짧고, 너무 소중하니까.


타인의 말이 내 인생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나의 인생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나 내 손안에 있다. 간섭으로 받아들이고 고통받을 수도, 그저 가벼운 농담처럼 흘려보낼 수도 있다. 나는 이제 그 둘 사이의 경계를 좀 더 느슨하게 바라보려 한다. 어차피 그들의 말이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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