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란 참 모호하다. 마치 손에 잡히지 않는 실과 같다. 잡으려 하면 미끄러지고, 느끼려 하면 이미 사라져 버린다. 위로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특히 나 같은 T형 인간에게는 더 그렇다. 감정은 일종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감정을 그냥 있는 그대로 두는 일은 여전히 어색하다. 해결책이 없을 때야말로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진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왜 그렇게 차갑게 말해?"라고 묻는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왜 그게 차갑게 들렸을까? 내가 건넨 ‘괜찮아, 다 잘될 거야’라는 말들이 마치 은행 대기표처럼 느껴졌을까? 어차피 기다리면 차례가 오겠지만, 그게 지금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말 자체로는 진심이었지만, 그 진심이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나는 내가 사람들의 마음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실감했다. 마치 자동응답기에서 “문의가 접수되었습니다”라는 소리를 듣고 안도할 수 없는 것처럼, 내 말은 그냥 형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F형 인간들은 감정적 위로를 마치 본능처럼 한다. 그들의 말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그 사람의 마음을 감싸 안는다. 마치 잘 따뜻해진 전기담요처럼. 나에게는 전기담요의 코드가 맞지 않은 듯했다. 내 말들은 차갑게 차단된 전기 회로처럼 닿지 않고, 상대방의 마음을 휘젓고 떠나버린다. 나는 내 말들이 따뜻한 온기를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조금씩 실망한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생각한다. 내가 정말 위로할 줄 모르는 걸까?
위로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나 자신조차도 설득되지 않는 말들을 남에게 건네면서도 나는 그 말들이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다른 소리가 들렸다. "이게 정말 위로가 맞을까? 그냥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이런 내적 대화 속에서 나는 차라리 해결책을 제시하며 그 길로 도망치려 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렇다. 그 순간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중요한데, 나는 그 말을 한참이나 이해하지 못했다.
한 번은 누군가 내게 "그냥 이 상황에 같이 있어 줘"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내 귀에 들리는 순간, 나는 마치 미로에 갇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같이 있어 달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물리적으로 내 옆에 있으면 되는 건가, 아니면 감정적으로 나와 동행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위로라는 것이 단순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 속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위로를 문제 해결로 생각했다. "불이 났다면, 당연히 소화기를 찾아야 하지 않나?"라는 논리로 움직이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소화기보다는 내 옆에 서서 "불이 나서 무섭지? 나도 그래"라는 말을 원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고통 앞에서 소화기를 들고 있었고, 나와 같은 감정 속에 함께 머물러 줄 용기가 없었다. 아마도, 나는 그 용기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위로는 감정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감정 속에서 함께 머무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는 사실 고통을 회피하려는 나의 본능이었고, 그 순간의 감정을 진심으로 느끼기보다, 그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을 인정받고 싶었고, 그 고통 속에서 누군가가 함께 있어주길 바랐다.
결국 나는 점점 위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위로는 단순히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다. 차가운 계산기를 꺼내 들고 논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그냥 함께 앉아 있는 것이다. 위로란 그 순간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그 감정이 지나가도록 기다리는 일이다. 나는 그 단순한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위로의 언어를 배울 수 있다면, 그 언어는 나의 삶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그 언어는 분명 필요하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속에 머무르는 용기이자, 나 자신을 조금 더 인간답게 만드는 과정일 것이다. 결국 위로는 해결책이 아니라, 함께하는 선택이다. 그 선택이 나를 조금 더 인간으로 만들고, 우리를 조금 더 가까워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