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알고 싶어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끊임없이 궁금해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종종 아주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우리는 타인의 판단을 싫어하면서도, 정작 누군가가 ‘이건 네가 타고난 거야’라고 말하면 그 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 원래 그런 거였구나!"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말은 사주에서 나오든, MBTI에서 나오든, 혈액형이나 별자리에서 나오든 중요하지 않다. 그건 나를 대신 정의해 주는 말이니까.
이건 참 모순적인 일이다. 스스로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는 싫고, 그렇다고 타인의 평가를 듣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정해진 운명’이나 ‘타고난 성격’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가 나를 설명해 줄 때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뭐랄까, 자기 자신에 대해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어진 기분이랄까. 그러니까, 누군가가 ‘네 성격은 원래 그래’라고 말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면 되는 거니까.
생각해 보면, 이런 심리 테스트나 사주풀이가 인기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인생 속에서 불확실성을 끊임없이 마주한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누군가가 ‘너는 원래 이렇다’고 말해주면, 우리는 그 말을 마치 구조선이라도 받은 듯 꽉 붙잡게 된다. 더 이상 나 자신을 분석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그 틀 안에서 행동하면 되니까 말이다. 마치 자기 탐구의 복잡한 과정을 건너뛸 수 있는 지름길이 생긴 기분이 든다.
이건 어찌 보면 꽤 편리한 일이다. 자기 자신을 깊이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때로는 나 자신과 맞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대신 정의해 주면 그런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이런 행동을 해도 괜찮아." 어떤가, 이런 말이야말로 현대인의 자기 합리화의 정수 아닐까? 사람들은 ‘내가 왜 이렇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너무 쉽게 찾으려고 한다. 그 답을 찾는 과정이 힘들기 때문이다. MBTI 결과 하나로 모든 답을 얻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별자리 운세가 하루의 기분을 좌우하게 내버려 두는 건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단순화의 한 단면일 뿐이다.
사람들은 타인이 나를 판단하는 것을 참 싫어한다. "너는 원래 이런 성격이잖아", "넌 왜 항상 그렇게 행동해?" 같은 말을 듣는 건 불쾌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말이 사주나 MBTI 같은 틀에서 나올 때는 쉽게 받아들인다. "넌 ENFP라서 그래", "넌 물병자리라 원래 고집이 세잖아" 같은 말들은 마치 과학적 근거라도 있는 것처럼 다가오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아낸다. 사실 그건 단순히 자기 자신을 더 이상 탐구하지 않겠다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말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친구가 그런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MBTI 테스트 결과로 그렇게 나오면 뭔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타인의 평가를 거부하면서도, 운명이나 성격유형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나를 정의해 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이는 이 모순적인 모습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내 성격, 내 행동, 내 인생을 스스로 탐구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가 대신 나를 정의해 주기를 바란다. 정해진 답이 있다는 사실은 일종의 안도감을 준다. 더 이상 내가 왜 이런 사람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인 건 다 정해져 있었던 거야”라는 말은 그 고민을 덜어준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깊이 파고들 필요가 없어진다. 대신, 그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가면 된다. 그 틀이 맞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사실, 이건 자기 탐구를 포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깊이 이해하려고 하는 대신, 누군가가 정해준 프레임 안에 자신을 맞추고 그 안에서 안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프레임이 과연 진짜 나일까? 어쩌면 그건 단지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핑계일지도 모른다. 사주나 MBTI는 마치 대단한 해답이라도 된 듯 우리에게 자신의 길을 제시하지만, 그건 사실상 우리에게서 선택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또 다른 도구일 뿐이다.
우리는 때로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기 때문에,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이런 것들에 의존한다. 사주나 타로가 나의 운명을 말해주기를 바란다. "올해는 조심해야 한다"거나 "이 선택은 옳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정말로 나의 선택일까? 우리는 무언가가 정해져 있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 속에서 스스로의 결정을 점점 포기하게 된다. "어쩔 수 없지, 난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라고 말하는 건 결국, 내가 더 이상 내 삶을 스스로 통제하지 않겠다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진짜 두려운 것은 미래의 불확실성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대신,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스스로의 선택을 포기하는 우리 자신이다. 그 선택이 나를 성장하게 만들고,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일지라도, 그 선택을 통해 우리는 배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 하지만 사주나 MBTI에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그 선택의 기회를 점점 잃게 된다.
결국,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사주가 말해주는 운명이 나의 인생을 대신 만들어줄 수는 없다. MBTI가 나를 대신 정의할 수도 없다. 우리는 불확실성 속에서 스스로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나아가는 것이다. 내 삶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지, 누군가 대신 정의해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아는 일은 긴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우리는 많은 혼란과 불안에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 성장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발견의 길이다. 타인이 나를 대신 정의해 주는 순간, 나는 내 삶의 주체가 아니게 된다. 그리고 그 틀 안에서 나를 한정 지으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
우리의 삶은 정해진 답이 없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결정을 통해 나아간다.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 누군가 대신 정의해 주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를 알기 위해서는, 그 불확실한 여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걸어가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