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you have is yourself
토요일 아침, 친구들과 우붓 로컬 시장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 서양 남자가 예쁜 새들을 판매하는 가게 앞에서 진지한 얼굴로 한참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 후 가게 주인은 새장을 열어 10마리 남짓의 새들을 날려주었다. 그중 한 마리는 날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고, 주어진 자유에 저항하는 듯 차도로 고꾸라지는 바람에 한 아이가 새를 구하듯 빠르게 잡아서 다시 새장에 넣었다. 한참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때쯤, 유심을 사러 갔던 친구는 볼일을 마치고 나왔고 우리는 버스를 타러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한참 그 광경 속에서 받은 감동만 되새겼다.
방생을 통해 자비심을 수련하는 한 남자와 그의 자비를 거절하듯 다시 새장 안으로 들어간 한 마리의 새.
작년에 회사생활을 그만둘 때쯤, 나는 많이 아팠다. 매 순간 숨이 찼고, 잠을 자는 동안에도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아침에 일어날 때면 밤새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지쳐있었다. 출근할 힘이 없어서 매일같이 택시에 몸을 실어 사무실로 출근했고, 회사에서 업무를 부탁하려는 상사는 너무나 아파 보이는 내 얼굴에 놀라 자기가 하겠다고 돌아서던 경우도 있었다. 병원에 방문해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고 행여나 내 태도가 꾀병으로 보일까봐 아프다는 말을 최대한 아끼며 회사생활을 이어갔다.
원인을 찾을 수 없던 아픔이 3개월쯤 지속될 쯤 상사와 작은 트러블이 생겼다. 이전에도 업무외적으로 상사의 말실수 때문에 몇 번의 트러블이 있었고, 그때마다 ‘성격 좋은 줄 알았는데, 잊어잊어.’라는 할 말 없어지는 대답에 억울함을 삼켰지만, 몸도 마음도 지쳐가던 나는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평소와 다른 내 반응에 놀란 듯 그는 사기 증진이 목적이었다고 변명했고, ‘저는 오히려 사기가 떨어져서 함께 일하기 힘들다’는 대답과 함께 최대한 빨리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평소에도 같은 이유로 아랫직원을 많이 그만두게 만들었던 그 상사는 발 빠르게 임원에게 연락해서 내 태도에 대해서 고자질했고, 그 임원은 그 때문이었을까, 도움을 청한 내 연락에 응답하지 않았다. 업무 특성상 팀 단위 업무가 많아 언제나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중요시하던 임원이었기에, 문자도 전화도 무시해버린 임원의 행동에 나는 마치 팀에서 뻥- 차인 기분이 들었다.
내 입장에서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아니 그들 입장에서는 전문가로서의 책임감을 위해서, 나는 그날 이후 맡은 프로젝트들의 보고서가 발행되는 날까지 업무를 이어가야 했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마무리했던 약 2주 동안 나와 상사는 해결되지 않은 불편한 감정은 서로 눌러둔 채, 불가피한 업무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있을 때만 마주했다.
여리고 약한 마음이 새어나갈까 불안할 때면 곧 주어질 자유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달랬다. - 그리고 이 시기에 나는 내 허용치를 넘어선 부정적인 감정을 음식에 이입해서 해소하는 폭식증이 생겼다. 폭식증도 잠깐일 뿐 퇴사하면 자연스레 사라질 줄 알았다. - 보고서가 발행된 날, 임원 방에 들어가 퇴사 일자를 승인받았다. 드디어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오는 순간, 그저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영영 회사를 그만두지 못했을 거야.
언제나 둥글둥글. ‘왜?’라고 고민하고 물어볼 시간에 일단 업무를 시작하자. 윗사람에게 말대답하지 말자.
평소 거절을 잘 못하고 싫은 소리도 못하는 성격이라 학교생활부터 회사생활까지 사회에서 누구랑도 싸워본 적 없던 순탄한 삶이었기에 이런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매정한 사람들이었나’하는 실망보다는 ‘굳이 마음 쓰면서 죄송해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개운한 마음이었다. 판도라의 상자인 줄 알고 30년간 열어보지 않았는데 뒤집고 보니 새장을 탈출할 문이 열려있는 느낌이랄까.
버스에서 내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친구는 우리의 인생도 새장의 새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다. 우리도 사회에서 주어진 여러 역할 속에서 때론 갑갑함을 느끼고 자유를 꿈꾸며 살아간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타인이 우리를 위해 자유를 기도하고 방생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새장을 떠나 자유를 향해 날아갈 수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회사라는 새장을 떠나려고 아팠던 것 같다. 시름시름 앓는 새는 주인 입장에서 데리고 있어 봤자 쓸모가 없기에 새장 밖으로 버리듯, 결정을 못하고 버티는 날 위해 내 몸과 마음이 떠나가라고 신호를 준 거 아닐까.
이번 발리 여행을 준비하면서 지갑을 정리했다. 한국에서 쓰던 주민등록증을 책상 서랍에 넣었고, 작년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경험과 맞닿은 메시지를 주민등록증이 있던 자리에 잘 보이게 꽂아두었다.
“다시는 어떤 가르침도 받지 말아야지. 나 자신에게서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이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야지.” -싯다르타-
아파서 새장을 나왔던 나, 그리고 아파서 다시 새장으로 들어간 새 한 마리. 지갑 속 문구를 떠올리니 오늘 아침 저 광경을 보며 내가 받은 감동이 무엇이었는지 정리되었다.
새장 속 애완동물이든, 자연 속 들새든 무조건 따라야하는 절대적인 삶의 방식의 형태는 없다. 그저 내가 경험하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내가 머물 곳을 스스로 선택할 뿐.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 내 선택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것. 그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며 흔들리거나,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를 보고 틀렸다고 판단하지 않는 것이 결국 우리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라는 것.
“우리는 ‘나처럼 해봐.’라고 말하는 사람 곁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말하는 사람만이 우리의 스승이 될 수 있다. 벽에 누군가가 문을 그려놓았다고 해서 문이 아니다. 단지 그것이 문이라고 우리의 마음이 세뇌당했을 뿐이다. 문은 우리 스스로 벽을 뚫어야 만들어진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류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