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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유 Ayu Oct 17. 2022

내면의 목소리

소명


우붓에 지내는 동안 매주 화요일 저녁에 노래 수업에 참여해왔다. 다양한 요가 만트라를 노래로 엮어서 부르는 수업이라 낯선 산스크리트어의 만트라를 익힐 수 있어 좋고, 기타, 하모니움, 젬베 등의 악기 연주에 내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실을 때면 음악의 멜로디와 리듬을 더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다.

수업이 끝날 때면 선생님이 매번 제안하는 루틴이 있는데, 악기를 연주한 뮤지션들에게, 그다음엔 가장 최고의 연주자이자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스스로에게, 마지막으로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와 축복의 마음을 담아 사랑의 미소와 손짓을 보내는 행위였다. 그리고 더 큰 연결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고 잘 모르는 사람과 포옹을 하자고 했다. 선생님의 부드럽고 온화한 안내 덕분에 수업을 마치고도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쑥스러운 마음 없이 모두가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갈 수 있었다.


이 수업에 두 번째 참여한 날, 약 두 시간 동안 내 옆에서 노래했던 사람과 포옹을 나누고 서로의 소개로 대화를 이어가다가 그 친구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What do you offer in here? Yoga? Meditation?


직업을 묻는 질문이라 하기엔 너무 겸손한 표현이라 느껴졌고, 그런 질문을 하는 그는 어느 분야로든 세상에 기여하며 살아가자는 신념을 가진 사람 같았다.


그 친구와 대화를 마치고 집에 걸어오는 길에, 그리고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나는 그 질문을 떠올렷다.

생각해보니 노래 수업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고정멤버가 아니었다. 나에게 저 질문을 했던 친구에게 다음 주에도 오냐고 물으니 “당연하지! 다음 주엔 내가 하모니움을 연주하거든.”이라고 대답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한 요가원에서 함께 요가 수업을 듣던 아이가 그곳에서 젬베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수동적인 자세가 아닌 하고 싶다는 자발성과 적극적인 자세를 보며 그 친구의 질문 속 “offer”라는 단어가 참 절묘했다는 생각을 했다.



 


2020년 상반기의 어느 일요일, 코로나가 한창 심각하던 시절, 정부에서 실내체육센터 이용을 중단시킨 적이 있었다.

발표가 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니던 요가원에서는 다음날 아침부터 온라인 수업을 위한 공지와 개인매트를 가져갈 수 있도록 요가원을 열어둘 테니 언제든 매트를 가져가라는 연락이 왔다. 갑작스러운 정부의 정책에 헬스장에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산스장 - 코시국에 산에 있는 운동기구로 헬스장의 운동 루틴을 대체하며 생긴 신조어 - 을 찾느라 분주했지만, 우리 요가원 사람들은 선생님의 신속한 대처로 나름 안정적으로 요가 수련을 지속할 수 있었다.

우리는 선생님과 매주 토요일은 요가 수업 후 약 1시간 동안 함께 둘러앉아 질문과 고민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었는데, 약 한 달간의 실내체육시설 집합 금지 명령이 풀린 첫 토요일에 선생님은 본인이 20년 요가를 가르치면서 온라인 요가 수업을 열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오랜만에 모인 대화시간의 물꼬를 텄다. 우리는 그날 코로나로 변한 일상에 있어 힘든 부분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수업 마지막에 선생님은 이런 얘기를 하셨다.


자기는 커리어 또는 직업으로서 요가강사를 하는 게 아니라고. 요가강사가 되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도록 부름 받았기에 행하는 것뿐이라고. 그래서 요즘같이 불안한 시기에 우리의 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돕고 싶으니 언제든 힘든 일을 나누자고.


그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는 동안 정말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어떤 게 부름 받았다는 느낌일까?


그때부터 나는 각자의 소명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고, 나의 소명은 무엇일까-를 잠시 고민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인생도 다람쥐와 별로 다를 바 없으니 큰 의미를 찾기보단 가볍고 산뜻하게 살자는 결론으로 짧은 고민은 막을 내렸지만 말이다.






4개월 동안 발리에서 지내며 몇 번의 강한 지진을 경험한 후 지진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다. 잠을 자다가도 침대가 흔들리는 느낌에 바로 눈을 떴고, 핸드폰을 집어 구글에 발리 지진을 검색해보면 역시나 3분 전 발리 지진 발생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예민했다.

발리를 떠나기 하루 전, 한창 자주 갔던 카페에 들렀다. 우붓의 중심에 위치한 까닭에 이른 아침부터 항상 북적이는 카페이기에 그날도 중앙의 큰 공용 테이블에 하나 남은 자리에 앉아 늘 마시던 플랫화이트 with 오트 밀크를 마지막으로 주문했다. 한창 커피를 마시며 테이블에 골똘히 머리를 기울여 책을 읽다가 갑자기 테이블이 흔들리는 느낌에 빠르게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지진은 아니었고, 공용 테이블이라 맞은편 사람이 크게 움직이는 바람에 테이블이 흔들린 것이었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 순간,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애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댄스 수업에서 나를 봤다며. 그 친구가 언급한 수업은 내가 꽤 오래전 참여했던 수업이라 나는 그 친구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나를 알아봐 준 마음이 고마웠고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친구: 우붓 살아?
나: 아니, 나는 4개월 여행하고 내일이면 떠나! 너는?
친구: 나는 여기 산지 1년 반 정도 됐어.
나: 우와, 멋지다. 너는 여기서 일해?
친구: 응, 나는 호흡수련을 가르치고 있어.
나: 오, 정말 멋지다… 나는 한국 가서 뭘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
친구: 목소리에 대한 거야?
나: 응?… 목소리?


그 친구에게 되묻고 찬찬히 들어보니 그가 하려던 말은 “내면의 목소리”에 대한 것이었다.

아직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지 못한 거야?


친구의 심오한 질문을 듣다가 주마등처럼 한 달 전 무엇을 제공하고 있냐는 질문우리 요가 선생님이 말했던 자신의 소명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들은 모두 내면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우붓에서 요가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자주 그들의 자신감이 부러웠다. 확고하고 편안해 보였다. 알게 모르게 우붓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과 나의 차이점을 꾸준히 고민했던 것 같다.

나는 왜 직업뿐 아니라 봉사활동을 할 때도 무언가 임무를 행하듯 항상 걱정과 긴장이 앞섰을까. 나는 내 완벽주의 성향이 돈을 받는 일을 할 때 극대화된다고 생각했는데, 봉사활동을 할 때도 긴장하는 내 모습을 보며, 대가성이 핵심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돈을 잘 벌고 싶다,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 실수하면 안 된다, 잘 보이고 싶다, 잘나 보이고 싶다.


세상으로부터 받은 만큼 나의 재능을 기여하고 싶다, 나도 참여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소명이다.


직업을 선택하는 나의 관점이 항상 외부에 있었다면 그들의 관점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친구와의 짧은 대화에서 “나는 왜 항상 걱정과 긴장이 앞서는지, 그리고 확고하고 편안한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궁금증에 핵심적인 힌트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러다 그 친구의 발을 봤는데 그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야, 너네는 왜 맨발로 다녀? 아까 네 옆에 앉은 친구도 내가 아침마다 요가 가는 길에 동선이 겹쳐서 자주 보는데 항상 맨발로 걷던데. 도로에 개똥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걸어 다니니…”라고 물어봤고 그 친구는 그저 웃으며 “맨발로 다녀도 안전하다는걸 계속 연습하는 거야! 책상만 흔들려도 지진이 날까 봐 걱정하는 너한테 이 연습이 딱이네, 너도 맨발로 걸어봐. “라고 말하곤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무엇을 붙잡고 싶어 사소한 긴장들 속에서 살아왔던 걸까?
이 긴장을 풀고 나면 나도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그러고 나면 나도 어떠한 일을 하든 확고하고 편안할 수 있을까?


카페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서 걷다가 나도 신발을 벗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괜찮으니 그 친구 말대로 긴장을 푸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해보겠다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사실은, 이런 습관을 따라 해서라도 그들처럼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진짜로 체험했다. 나는 자연의 내던짐이었다. 불확실성을 향한, 어쩌면 새로움을 향한.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향한 내던짐이었다. 그리고 태고의 깊이에서 나오는 이 내던짐이 완전히 이루어지도록 내 안에서 그 의지를 느끼고, 그것을 완전히 나의 의지로 삼는 것. 그것만이 내 소명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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