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링크드인으로 구인 안내 메시지를 받는다. 언제 사용할지 몰라 틈틈이 업데이트해 두었던 영문 이력과 재택/대면재택혼합 옵션만 받겠다고 설정해 두었기에 대부분의 모집 글은 싱가포르에 위치한 아시아 Hub 회사들이다. 모집 글에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 불필요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게 싫어 현재 위치를 스페인으로 바꿔두곤 앱을 지웠다.
한 달 전 엄마랑 통화를 하다가, 엄마랑 언쟁이 붙었다. 아니다, 평소엔 엄마가 하는 말에 고분고분하는데 그날은 엄마한테 대들었다. 엄마 잔소리 듣기 싫은데, 잔소리 말고 나한테 응원이나 지지를 내어줄 순 없어?라고 말하곤 엉엉 울었다.
울고 있는 나에게 다가온 S에게 엄마랑 있었던 일을 말하니, 그는 이런다.
이제 잔소리에 반응하는 거 보니 에너지가 다 찼네. 너 이제 뭐든 시작할 때가 됐나 보다.
내 현지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래서 전화 올 일도 없는데, 일주일 전쯤 똑같은 번호로 5번이나 전화가 울렸다. 스팸전화겠거니 하고 받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나를 애타게 찾는 것 같은 느낌이 진하게 들었다. 정말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잘 회복되어 게이지가 찬 걸까? 그 느낌에 나는 오랜만에 링크드인을 접속해 보는 것으로 반응했다.
그로부터 이틀 전, 한 여자로부터 메시지가 와있었다. 독일에 위치한 유럽 회사 hub인데, 한국 회사의 지사라 한국어/영어 가능한 회계사를 모집한다는 안내문이었다. 스페인어로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한국인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일할 예정이라는 것도, 여러모로 솔깃한 제안이라 마음이 부풀었고 세부 내용을 나눌 면접 일정을 잡았다!
준비와 결과물은 비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어떤 준비에도 철저한 편이다. 잘 준비하고, 잘 결과를 내면, 잘 인정을 받을 테니!
면접 준비를 할 대략적인 계획을 짜 책상에 앉았는데, 한숨만 푹푹 나왔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영어로 말하다가 더듬으면 어떡하지?
전문용어들이 떠오르지 않으면 어떡하지?
이건 해봤던 업무였나?...
새로운 마음으로 준비하고 싶었는데, 책상에 앉아있는 2시간 동안 회사를 그만두기 직전 기억과 감정들이 하나둘 떠오르니 마음이 어지럽고, 몸이 무거워졌다. 사람들이 정한 기준에 나를 맞추려 애썼던 기억들에 휩싸여 도저히 진도를 내지 못한 채 노트북을 닫았다.
지금껏 마음에 앉은 찌꺼기를 잘 소화시켜 보내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시간이 해결해 주는 건 아니었나 보다. 예전 기억에서 나아가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건 새로운 경험으로 메꾸어가는 것이었다.
'조건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싶다는 소망을 경험으로 탈바꿈시켜 보자!'
그래서 아무 준비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둬보자. 새로운 친구랑 대화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이유로든 흐름이 막히면 인연이 아닌 걸로.
면접 당일, 아무 생각 없이 팀즈 화상 통화 링크까지 눌렀는데, 화면이 연결되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가슴이 콩콩콩 뛰었다. 망할... 날것 그대로 평가받을 생각을 하니 잔뜩 긴장이 되었다.
면접을 진행하는 동안 나는 내가 이렇게 영어를 잘했나? 싶을 정도로 순간순간 떠오르는데 조리 있게 말을 해냈다. 면접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더하는 나를 보며 면접관은 호호, 그런 거까지 말해주다니 고마워.라고 말했다. 세부적인 업무 경험에 대한 질문에도 솔직히 말했다. 그 업무는 많이 해본 적 없다고.
아무런 준비 없이 흐름에 맡기겠다고 결심하고 참여하니,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오히려 그녀가 너무 틀에 박혀 보였던 것이다. 로봇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기에 대한 소개, 회사 소개, 팀 소개 들을 유창하지만 영혼 없이 쏟아내고 나의 질문에 대해선 최대한 보수적이면서도 불명확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면서 Boring as Hell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예전 회사에서 본인을 똑같은 말만 하는 앵무새라고 칭하던 상사가 떠올랐고 그곳과 별반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에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은 매력이 훅- 떨어졌다.
면접을 마치고 그녀는 내부적으로 연봉 협의 후 다음 절차를 이어가자고 말하곤 내 메일로 CV 요청을 해왔지만, 정중하게 거절하고 면접을 마무리했다.
내 조건이 그들 기준에 맞으면 합격, 조건 미달이면 불합격…
예전엔 회사 면접을 바라보는 관점이 항상 조건에 있었다. 그 조건이 뭔지도 모르면서 합격을 향해 달릴 땐 나는 항상 부족하고 무언가 채워야 하는 존재이며,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 두려움을 없애고 싶어 면접 준비에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쏟을수록 그만큼에 비례해 올라간 기대치는 불합격에 대한 상심과 두려움을 부풀렸다.
존재 자체로 사랑받고 환영받을 자격이 있음을 경험하고 믿어가는 중인 지금은 어떠한가?
나는 있는 그대로의 지금의 나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면 되고, 그들이 거절한다면 애초에 나에게 버거운 일일 테니 잘된 일이라 생각하고 면접에 임했다. 애초에 준비한 게 없어서 인정받고 싶다는 기대치도 없었고, 머릿속에 '나, 나, 나 좀 봐주세요!'라는 욕심이 사라지고 나니 한발 물러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 회사는 나를 조건으로 바라보는구나…를 느낀 순간 내가 먼저 손을 놓게 되었다.
2021년 선생님은 한국을 떠나기 전, 요즘 몸에 기운이 없어서 먹는 걸 돌아본다는 나의 말에 한참을 침묵하시다가 말씀하셨다. 세상엔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말이 유명하지만 "You are what you digest."라는 말이 떠오른다고, 소화과정은 음식을 섭취 후 영양분을 흡수하고 배설까지의 모든 과정을 포함하는데, 혹시 어떤 마음의 짐을 버리지 못하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라는 사인을 주셨다.
삶이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면, 내 마음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마음이 나를 괴롭게 할 믿음으로 가득 찬 건 아닌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범위까지 끌어안아 버거운 건 아닌지..
내 마음 하나 돌아보고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가뿐히 그리고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상, 예전과 같은 환경 속에서 예전과 같이 반응하지 않으려 시도해 보았던 근래의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