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 걸 참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울 때마다 소화되지 못해 쌓인 내면의 앙금과 찌꺼기가 정화되는 것 같아 울 때마다 어딘가 마음 한 편이 시원하다. 언젠가 난 "Art of Crying"이라는 주제로 울음이 얼마나 좋은 건지 알리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아...
S와 연애를 시작하고 첫 3개월 동안 함께하고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아빠에 대한 미움이 아주 크게 올라왔다. 내가 보고 자라온 아빠, 나와는 다른 남자라는 성별... 하지만 살면서 평생 부대껴야 하는 그 남자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은 언제나 아빠였는데, S는 그 틀 너머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편안함과 즐거움을 동반한 시간들이 쌓일수록 '우리 아빠는 왜 이런 사랑을 주지 않아 나를 이렇게 결핍 많은 아이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미움이 커져갔다.
2023년 3월, 불국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던 날, 108배를 하며 염주를 꿰는 활동을 했다. 108배를 하기 전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잘 돼야 내가 잘 풀려요. 그러니 오늘 108배를 하고 염주를 꿰면서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기도해 봅시다."
나는 (약간의 죄책감과 함께) 아빠를 생각하며 아빠의 행복을 위해 절을 하고 염주를 꿰었다.
2023년 4월, 스페인에서 오기 전에 2년 만에 심리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다. 6월에 스페인에 가기 전 가장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이었다.
"선생님, 제가 남자친구한테 정신적으로 너무 크게 의지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스페인에 가면 환경적으로도 많이 의지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으로 흘러가는 게 저에게 건강한 선택이 맞는지 알고 싶어요."
선생님과 몇 차례 상담을 하면서 주로 다룬 이슈는 결국 아빠와의 관계였다.
- 아빠는 미워해도 돼. 지혜는 딸로서 역할을 차고 넘치게 했다. 젊을 때 가슴이 이끄는 곳으로 훨훨 날아가렴.
- 지금 남자친구가 어릴 적 결핍을 잘 충족시켜 주는 것 같은데 그런 게 인연이기도 한 거야. 왠지 결혼할 것 같은데? 결혼하게 되면 선생님 초대해 줄래? 꼭 참석하고 싶다!
상담을 몇 차례 진행하며 선생님의 응원을 듬뿍 받고 나서야 스페인에 가는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2023년 6월,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날 집에서 마주친 아빠는 짐은 다 챙겼냐 한 마디 물어보시곤 나를 쳐다보지도, 어떤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엄마랑 언니랑 함께 공항으로 이동하는 중,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 둘째 딸,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다급하게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데 어제의 무심했던 아빠에 대한 서운함이 불쑥 눈물과 함께 터져 나왔다. 아빠는 항상 그런 식이지. 꼭 이렇게 마지막에 마음을 약하게 만들지... 또 미웠다.
스페인에 지내면서도 불쑥불쑥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아빠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자주 마주했다. 곧 한국에 가는데 한국에 지내는 동안 아빠를 다시 만날 생각을 하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도 자꾸 화가 난다.
내 안 어디까지 깊게 번져있는 상처라 정화하고 정화해도 아직도 미움이 지속되는진 모르겠지만, 이 정화가 끝나는 가까운 미래엔 더 깊은 사랑으로 아빠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진실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은 큰 슬픔과 고통 너머에 있다.
상처의 크기와 깊이가 크면 클수록 우리는 더 성장할 기회를 제시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동반되는 울음과 화 같은 격정적 감정은 내면에 남은 상처의 앙금을 치유하는 도구이니 두 팔 벌려 환영할 소중한 감정인 것이다. 잘 울고, 잘 화내고 소리 지르고, 잘 털어내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더 단단하고 성숙한 내가 되어있을 것이다. 탄소 원자가 높은 압력과 온도를 견뎌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