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 동안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았고, 그렇게 지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괜찮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S와 함께 사람들을 만나고 소셜라이징을 하는 상황이 오면 숨이 조여 오는듯해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피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으니까.
한 번은 중요한 업무를 끝마치고 1년을 커리큘럼을 마무리하는 기념으로 S의 비즈니스 관련 사람들과 저녁 파티를 하기로 한 날, 사람들은 이미 기다리는데 약속 30분 전에 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이미 여러 차례 이런 모습을 보였고, 이반은 자신의 업무차 온 자리에 이렇게 이기적인 짓을 하는 나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 소셜포비아 있어?"
한국에서 성취했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스페인에 왔을 때 영어나 스페인어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나는 늘 불안했다. 일도 안 하고 말도 못 하는 나를 모지리 취급할 것 같고, 그렇게 위축된 모습을 보면 또 나를 볼품없는 사람이라 볼 것 같았다.
피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반복적으로 부딪히는 이런 상황에 주기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터지곤 했는데, (매일 집에 있었던 덕분에) 그런 감정이 터질 때마다 혼자 독립된 공간에 매트를 피고 앉아 눈을 감아보았다. 가슴과 배에 한 손씩 올리고 숨을 살피는 것도 현재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허용하는데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가슴이 아리게 아프거나, 두통이 쨍하게 오거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관찰하다 보면 머릿속에 많은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소리치며 모두 부수어버리는 가상의 나를 본 적도 있고, 정말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 수치스러웠던 경험이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한 번은 불쑥 떠오른 어렸을 때의 기억 속 어린 내가 너무나 생생해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린 적도 있었는데,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 울다가 S에게 소리쳤다. “이제 난 어떡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는 말했다. "더 해야 할 것은 없어. 그 과정 자체가 치유인걸."
산뜻하고 아름답고 편안한 상황 속에서 소위 말하는 '힐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세계인 잠재의식을 치유하는 과정은 오열, 분노, 고함, 박살 같은 단어와 연관되는 추한 영역이었고,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치유 과정을 겪고, S에게 소셜포비아냐는 독침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발견한 점이라면, 나는 스페인에 와서 불안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 [어느 무리에 있던 난 이곳과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 내지는 [내 존재가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다]는 근원적 수치심을 지속적으로 느껴왔다는 것이다. 그저 갑옷처럼 치장했던 조건들을 다 벗어버린 지금에서야 그 불안함이 수면 위로 올라왔던 것이고.
마음 여린 우리 엄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도 않은 - 감정이 복받칠 때마다 찾아오는 사랑이 부족했던 - 유년기의 기억을 그대로 마주하고 인정한 후, 이제는 지금의 내가 ‘기억 속 어린 시절의 나’의 엄마가 되기로 했다.
'내' 행색이 초라한 것 같고, 사람들은 '나'를 환영하지 않는 것 같고, '내'가 괜히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것 같은 초조함과 불안함이 들 때마다 특유의 한숨을 쉬면서 '너는 있는 그대로 충분해.', '사람들은 너를 좋아해.' '사람들은 생각보다 너에게 관심이 없어.'라는 말을 되뇌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1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지나고 난 지금은 소셜라이징을 즐기고, 사람들을 만나서 울던 웃던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길 가는 사람들과 스몰토크던 롱토크를 리드하는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진정 한 뼘 성장했다고 느끼는 건 그 순간에 머릿속에 '내'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그 상황 속 대화의 흐름과 하나 되어, 적절한 드립에 사람들을 웃기면 뿌듯하고, 뜻대로 웃기지 못해도 그 자리를 뜨면 곱씹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는 여유가 생겼다! 이것이야말로 실로 'self-centric 한 나'로부터의 탈피가 아닌가. 그렇게 '나'를 일거수일투족 감시하듯 쓰던 에너지를 문밖으로 돌리고 나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이 '사랑과 연민 compassion'이더라.
누군가를 테이블에 마주하고 '내'가 어떻게 보일지 고민하던 관점이 상대방으로 가 그들의 모습을 관찰하다 보면, 어떤 연유로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지가 이해되고 응원하는 마음만 남는 것을 요즘 사람을 만나며 거듭 느낀다.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바탕으로 자아 투쟁을 버리고 상황 자체에 열릴 때, 있는 그대로를 보는 지혜가 생기고 그것이 연민과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는 책의 내용과 더불어, '우리는 왜 컴업떡을 돌리는 사람이 없냐'라는 한 수련생의 말에 컴업을 성공하면 떡을 돌리기보단, 봉사활동 단체에 가서 1일 봉사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에서 나온 건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지난주부터 다시 매일 일기를 쓰려고 오랜만에 일기장을 꺼내 들었다. 지난 1년 동안 써놓은 글을 돌아보는데 간헐적으로 일기를 끄적끄적 써놨더군?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일기장을 펼쳤던 것 같은데 모든 문장이 똑같은 표현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다. 이럴 땐 요가를 해야 하는데... 하기 싫다.'
반복적인 과거의 나의 패턴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진정 아사나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 감정의 기복을 줄이고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요가에 의존하고 있었네... 부정적 감정이 올라올 때, 그 안에 깊이 들어가 조사(investigate) 하며 치유의 과정을 겪고 난 후에 보니, '이렇게 요가에 의지하는 게 많았으니 그 짐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 요가 매트에 서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무겁고 하기 싫었겠지.'라며 감정을 혼자 다독이지 못해 묵혀두고 쌓아두고 타인과 사물과 행위에 의존하는 등 감정을 다루는데 서툴러 투쟁했던 여러 방식의 삼사라(samsara)가 보였다.
놀랍게도 오늘 쓴 글은 독후감이다...
원서로 “Cutting Through Spiritual Materialism"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한국어번역본은 아래와 같다.
불교와 요가 등의 마음공부가 서양 국가에 유입되면서 생긴 부작용 - 영적 수행을 또 하나의 에고의 먹이로 사용하는 것 - 을 꼬집는 내용인데, 사실 초반에 좀 거부감이 들고 읽기가 싫었는데 나도 알게 모르게 영적 물질주의에 이미 물들어서 (책의 표현에 따르면) 날카로운 칼을 든 의사와 같은 이 책의 내용들이 콕콕 찔러대서 그랬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어려웠고 끝부분이 엄청나게 지루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다 읽고 나니 근래 1년의 혼란했던 내적여정이 퍼즐처럼 맞춰지며 이해가 되고 치유의 과정을 온전히 돌아보고 정리할 수 있게 된 소중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