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 다른 시선

19.05.21 삼쇠섬 12일차(덴마크15일차)

by 김지현
그 아무것도 아닌 작은 변화가 생각보다 큰 만족감을 주고 있다.




42명의 단체 손님이 예약했다. 스티니는 이른 아침부터 혼자 나와 42명분과 그날 판매할 여분의 재료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에 식당에서 하는 일은 영업 전 오전에는 야채를 씻고 다듬는 일을, 영업이 시작되면 쉴 틈 없이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그릇을 정리한다. 오늘은 단체 주문이 있는 만큼 스티니를 도와 음식을 만들 예정이었다.




주방에는 이미 42개의 접시가 늘어서 있고 그 위에 버터 바른 빵이 세 조각씩 올라가 있었다. 스티니는 어제 퇴근하는 내게 내일 42개의 훔뭴러를 만들게 될 거라고 겁(?)을 줬는데 실은 스티니가 손질하고 양념해서 만들어놓은 재료들을 순서대로 빵 위에 올리기만 하면 됐다. 훔뭴러(håndmadder)는 빵 위에 여러 가지 토핑을 올려 먹는 덴마크식 기본 식사다. 스티니가 만든 훔뭴러는 세 종류로 삶은 감자와 튀긴 베이컨, 살라미와 갈릭·마요네즈에 버무린 콩, 얇게 썬 고기와 채소 샐러드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식당에서 쓰는 채소와 고기는 모두 킴이 직접 농사짓고 키운 것들이다. 스티니는 그날그날 쓸 재료들을 당일 아침에 밭에서 쓸 만큼만 뽑아와서 씻고 다듬는다. 그리고 그 일은 요즘 내가 맡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덴마크에서는 식기세척기가 일반화되어 있다. 일반 가정에서도 가정용 식기세척기를 대부분 사용하고 식당에서는 엄청난 에너지와 스팀으로 1-2분 만에 수십 개의 그릇을 깨끗이 세척해주는 기계를 쓰고 있다. 스티니 말에 따르면 기계가 한번 돌아가는데 5L의 물이 사용된다고 했다. 때문에 전용 트레이에 서로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그릇들을 차곡차곡 넣어 기계에 넣는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나면 펄펄 끓는 김으로 말끔하게 소독된 그릇이 나온다. 김을 살짝 식힌 뒤 남아 있는 물기를 닦고 그릇들을 정리하면 된다. 물론 계속해서 나오는 조리 도구와 손님이 몰려들 때면 한 번에 수십 개씩 접시가 쌓이지만 확실히 손으로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되니 한국의 식당일을 생각하면 훨씬 수월하다. 언젠가 음식을 만들어 파는 만화 카페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일하는 내내 양손 가득 습진을 달고 살아야 했다. 식기세척기가 익숙지 않은 덕분에 처음에는 이게 정말 깨끗하게 세척된 건가 하는 의심이 있었지만 금세 얼마나 유용한지 체감했다. 특히 이렇게 많은 양의 설거지가 필요한 식당에서는 더더욱.




덴마크에서는 가족 간의 수평적인 문화를 위해 어느 한쪽이 가사 일에 얽매이지 않도록 식기세척기가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다 같이 식사하고 휴식하는 동안 누구 한 명이 설거지에 매여 있지 않도록 말이다. 퇴근 시간이 이르고 주말이면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는 이유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 있다. 가족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개인의 여가와 여유를 위해 삶의 다양한 지표와 기준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지내고 있는 게스트하우스에도 풍요로운 여가를 위한 다양한 것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색연필이며 물감 같은 미술 용품부터 각종 뜨개실과 조각 천과 재봉틀, 책과 비디오까지. 스티니는 무엇이든 얼마든지 사용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잠깐 머물다 가는 게스트들에게도 다양한 경험과 여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의 태도가 엿보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원래부터’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이곳 또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시대가 있었고 여전히 노년 세대에는 그러한 가치관이 남아 있다. 스티니는 아무리 바쁜 와중이라도 킴의 식사를 손수 밭과 집까지 갖다주고 돌아오고 육아나 가사 일의 많은 부분을 전담하고 있다. 킴과 스티니의 표면적인 관계는 충분히 평등하게 보이지만 가사 노동에서 킴은 여전히 ‘도와주는’ 입장인 듯했다. 게스트를 관리하는 일도 스티니가 도맡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보다 젊은 세대는 많은 부분이 한국 사회와는 달랐다. 식당에서도 많은 아빠들이 식사 중에 아이를 돌보았고 여자들도 어디에서나 담배를 피웠다. 아무도 그런 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환경과 에너지에 대한 생각이 일상 속에도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삼쇠는 풍력과 더불어 노르뷔 마을 초입에는 커다란 마당에 태양전지판이 가득하다. 스티니는 식기세척기에 사용되는 물의 양을 거듭 강조하며 최대한 한 번에 많은 양의 설거지를 하도록 요령을 알려주고 물을 데울 때도 비교적 전기가 적게 드는 전기포트를 권장한다. 점심 타임이 지나고 주방을 한 차례 청소하고 나면 주방 불을 모두 꺼버린다. 가게들에는 냉난방 시설이 따로 없고 코펜하겐 같은 도시의 아파트들이 아니고서야 벽난로나 대부분 라디에이터를 쓴다. 대신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아침 저녁으로 기온차가 큰 날씨에 맞게 포근한 날에도 스카프나 두툼한 외투를 챙겨 다닌다. 덕분에 같은 계절에도 동시에 반팔과 패딩을 입고 다니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물론 그런 외양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직은 초심자의 행운이 따르는 덕분인지 이 낯선 나라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크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내가 떠나온 곳과 다른 문화들이 신기하면서 부럽게 느껴진다. 특히 별 것 아닌 변화일지 모르지만 삼쇠에 들어온 이후로 화장을 하지 않고 생활하고 있다. 물론 내가 발 딛고 있는, 즉 잘 보여야 할 환경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도 있겠지만 이곳에서는 화장 한 사람들을 찾는 것이 힘들 만큼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닌다. 화장을 한 나와 하지 않은 나를 보는 시선에 그 어떤 변화나 특이점도 없다. 사실 별 관심 없는 것에 가깝다. 그 아무것도 아닌 작은 변화가 생각보다 큰 만족감을 주고 있다. 사실 내가 갇혀있었던 것은 화장한 얼굴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내가 떠나온 세계를 떠올려본다.

이전 12화휴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