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산다는 것-다름과 불편함을 직면하기

19.05.26 삼쇠섬 17일차(덴마크21일차)

by 김지현
새로운 식구와 같이 살기 시작한 지 겨우 첫날, 크게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생활들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나들이에 나섰다. 이른 아침 스티니에게 부탁해 텔레버스를 타고 섬의 남쪽 동네 Tranebjerg로 향했다. 삼쇠의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Tranebjerg는 다양한 카페며 옷가게, 음식점 등이 모여 있고 삼쇠에서 유명한 관광지들이 근교에 있다. Nordby에서 텔레버스를 타고 평화로운 바닷길을 30분 정도 달리자 텅 빈 동네가 나타났다. 텔레버스는 3시쯤 다시 우리를 태우러 오기로 하고 큰 마트 앞에 내려주고 떠났다. 흐린 날씨만큼이나 허탈한 마음으로 우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이라 거의 대부분 상점들이 문을 닫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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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옷도 예쁘게 차려 입고 구글 지도를 보며 검색해 둔 멋진 카페들이 무색할 만큼 거리는 휑했다. 그나마 문을 여는 카페도 아직 오픈 전이라 하릴 없이 마트를 돌며 시간을 때웠다. 덴마크의 악명 높은 외식 물가와 달리 마트에서 파는 식재료며 생활 물품들은 결코 비싸지 않다. 오히려 고기나 채소류는 한국보다 더 저렴하기까지 하다. 덕분에 마트를 돌며 와! 싸다! 라는 이유만으로 야금야금 이것저것 담았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냉동 닭고기나 소고기 다짐육 같은 것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우리는 좌절된 휴일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정신없이 마트를 휘젓고 다녔다.


사실 우퍼의 생활은 다소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 보통 유기 농가의 일을 돕는 프로그램으로 소개되고 있으므로 대부분 농사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규모의 농장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다른 사업을 병행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일손을 필요로 하는 곳들이 우프를 활용하므로 비상업적인 작은 개인 농장만을 운영하는 경우는 드문 듯하다. 우퍼를 쓰는 농가는 농장에서 나는 작물과 축산물로 식당을 운영하거나 관광 사업을 하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농사일 반 다른 일 반이다. 지금 스티니네에서는 농사일보다도 식당 일을 더 많이 하고 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한국에서 하던 아르바이트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경험이 이뤄진다. 설거지하고 서빙하고 청소하고. 그럴 때면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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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노동에 대한 대가가 ‘숙식’이라는 것이 아주 애매하다. 스티니네 게스트하우스는 생각보다 잘 갖춰져 있고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깔끔한 편에 속하는데 깊은 시골에 있는 농가에서 제공하는 방은 복불복이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우프 사이트에는 게스트 방 사진은 없는 경우가 많거나 겨우 한두 장 대충 찍어 올린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먹을 것’에 대한 영역은 그 기준이 불분명한 탓에 문제까지 되지 않더라도 사람에 따라 불편한 경우가 생긴다. 이곳에서 지낸지 보름 정도 되자 우리도 슬슬 마트를 찾는 횟수가 잦아졌다. 스티니가 제공하는 음식이 양적으로는 결코 부족하진 않았지만 그 종류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사실 호스트 입장에서는 기본적인 식사를 제공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탓에 처음 도착해서부터 지금까지 매일 똑같은 빵과 살라미, 소시지와 치즈, 우유와 뮤슬리를 받고 있었다. 물론 다 맛있었지만 우리는 슬슬 물리고 있었다. 특히 게스트하우스에 온갖 향신료와 양념거리들이 있지만 그런 식재료를 잘 쓰지 않던 문화권에서 온 탓인지 도무지 어떤 요리를 만들어 먹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소시지와 살라미를 구워 빵과 함께 먹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레 마트에서 이것저것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노동에 값을 매긴다는 것은 어렵다. 같은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모든 노동이 다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느 날에는 5시간을 요리도 배우고 농담도 하며 여유롭게 일했지만 어느 날에는 화장실 한 번 갈 새도 없이 서빙을 하고 설거지와 청소를 한다. 그 두 값에는 같은 잠자리와 같은 식사가 제공된다. 과연 어느 정도의 숙식 환경을 적절하다고 여겨야 하는 걸까.


사실 뭔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는 기본적으로 제공되는 재료들에 큰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내가 가진 것과 다른 것을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면 ‘비교’라는 게 생기고 그제야 ‘다름’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진다. 나는 내가 받는 것이 어쩌면 ‘적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새로운 누군가가 나타나고서야 깨달았다. 우리 집에 새로운 우퍼가 온 것이다.


새로운 우퍼 베티는 우리보다는 나이가 있는 독일인 여자였다. 베티는 어제 오후 늦게 도착했다. 덴마크와 독일 국경 근처에 있는 마을에 사는 그는 자신의 전기 자전거를 끌고 친구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삼쇠로 들어왔다. 스티니에게서 새로운 우퍼가 도착할 거란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는 그를 위한 환영 케이크를 준비했다. 스티니에게서 배운 루밥 케이크(rabarber kage)였다. 보름 동안 게스트하우스에는 나와 쇠얀 둘만의 생활이 이루어졌다. 우리는 자유롭게 화장실을 쓰고 주방을 활보하고 거실 테이블을 독차지했다. 그런 생활에 젖어 있을 무렵 새로운 누군가, 그것도 영어가 서툰 우리 앞에 전혀 다른 언어권의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는 영어도 능숙하고 일상적인 수준의 덴마크어도 할 줄 알았다. 그와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막 도착해 정신이 없을 그를 위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가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그는 다소 놀란 얼굴로 바쁘게 움직이며 묵은 먼지를 털고 쓸고 닦았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나는 소시지와 살라미를 굽고 빵을 썰고 마트에서 사온 마카로니 샐러드를 덜었다. 베티는 감격에 겨운 얼굴로 연신 고맙다고 말하며 저녁을 먹고 케이크를 받았다. 나는 분명 우리의 앞날이 순조로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상냥하고 감정 표현이 풍부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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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눈을 뜬 나는 새로운 이와의 생활을 시작할 아침을 준비했다. 어젯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는 내게 커피를 좋아하는지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는 내게 그는 정말이지 활짝 웃어보이며 다행이다! 하고 소리쳤다. 커피를 정말 좋아하는 그는 앞으로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함께 먹을 커피를 준비하자며 내게 제안했고 나는 당연히 좋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보름 먼저 산 선배(?)로서 나는 우리의 첫 아침 커피를 준비했다. 커피포트에서 커피가 내려지는 동안 나는 씻고 나설 준비를 했다. 그 사이 그가 주방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커피 향이 가득 할 주방을 생각하며 나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곧이어 내가 주방에 들어가자, 베티의 뒷모습이 보였다. 베티는 싱크대에 금방 내려진 따뜻한 커피를 몽땅 부어버리고 있었다. 주방에는 고소한 커피향이 가득했다.


베티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는 “이 커피 네가 만든 거니?”하고 아무렇지 않게 묻더니 “이거 오래됐어.” 하며 커피를 마저 붓고는 커피가루 마저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는 금방 내린 커피가 뭐가 오래됐다는 거지? 하며 생각하다가 그의 말이 커피 가루가 오래됐다는 뜻임을 알아챘다. 처음 도착해서 몇 번이고 별 문제 없이 타 먹었던 커피였는데. 어쩌면 커피를 잘 아는 그가 느끼기에 그건 오래된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은 입맛에 커피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 모든 사실을 이해했다고 해도, 그가 전혀 악의를 갖고 한 행동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안다고 해도 그 순간 기분이 괜찮았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나는 그때 조금 상처받았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쏟아붓는 게 오래 된 커피가 아니라 내 호의인 것만 같았으니까.


베티는 곧 커피 기계까지 분해했다. 그러더니 이곳저곳을 살피며 싱크대에 몽땅 넣고 박박 씻기 시작했다. 우리가 잘 생활했던 곳들이 그에게는 더럽고 불편한 곳으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베티는 세제로 씻은 걸로도 모자라 전기 포트에 물을 데워 커피 기계에 따라 부으며 소독했다. 함께 쓰는 물건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건 공동 생활을 하는 사람으로서 고마운 일이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 행동들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왠지 잘 돌아가던 내 영역에 들어와 마음대로 이것저것을 바꾸려는 것처럼 여겨졌다. 더욱이 그 불편한 마음은 곧 스티니가 나타나면서 더 커졌다.


스티니는 베티 몫의 음식을 챙겨 게스트하우스에 나타났다. 스티니가 직접 만든 빵과 베티 몫의 우유, 소시지와 살라미, 치즈는 이미 우리가 받아두었던 것을 공동으로 먹고 모자라면 더 주겠다고 했다. 거기까지는 별다를 게 없었지만 스티니 손에는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 더 들려있었다. 우유 한 팩과 함께 요거트 한 팩, 평소 우리에게는 바나나와 오렌지만 주었던 것에 반해 이번에는 사과까지 있었다. 그리고는 베티를 향해 덧붙여 말했다. “미안. 파인애플은 없었어.”

베티는 괜찮다며 웃었고 둘은 간단한 덴마크어로 이야기를 나누며 웃었다. 우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상황을 보며 자꾸만 불편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 할수록 더 베티를 향한 태도와 우리를 향한 행동을 비교하게 됐다. 새로운 식구와 같이 살기 시작한 지 겨우 첫날, 크게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생활들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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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190526_123651451_04FEF19D-4503-4918-A1D7-4A57095AA7BC.JPG Sebastian burger, 다른 버거보다 1.5배 정도 커서 반으로 잘라달라고 하면 잘라준다. 116DKK(한화 약 2만원)


애써 아침의 기분을 씻어내며 유일하게 문을 연 식당에 들어섰다. 직원은 웃으면서 주문을 받고 음료도 추천해주고 우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처럼 주말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이 식당 안에 가득 찼다. 거리도 어느새 맑아졌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육즙이 흐르는 소고기 패티가 든 햄버거를 썰어 먹으며 책을 읽었다. 앞으로 펼쳐질 생활을 생각하자 이렇게 둘만 있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쇠얀은 커피 사건을 전해 듣고는 나 대신 더 분개하며 함께 있는 내내 도닥여주었다. 나는 그의 온기와 맛있는 음식에 금세 마음이 풀어졌다. 그렇게 우리만의 휴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Samsø Madsnedk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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