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밤

19.05.28 삼쇠섬 19일차(덴마크23일차)

by 김지현
소통은 같은 언어를 통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고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는 걸 그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는 나를 느끼며 깨달았다.





오랜만에 밭에 나갔다. 못 본 사이에 처음 이곳에 와서 심은 양파의 싹이 엄청 자랐다. 한알 한알 일렬로 가지런히 심은 양파밭이 한눈에 봐도 푸릇했다. 내 손으로 처음 싹을 틔워본 작물이다. 양파를 마른 흙 속으로 콕콕 박아넣으며 이렇게 한다고 정말 뭔가가 자라날까? 라고 생각한 것이 우스울 만큼 양파는 무럭무럭 자랐고, 심지어 무르고 곰팡이가 펴 솎아내 던져버린 양파들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한 뼘씩 틔우고 있었다. 생명은 이다지도 신비하고 무섭다. 그리고 그걸 키우는 일은 고된 몸의 피로도 싹 가실 만큼 감동이 있었다. 첫 주를 밭에서 일하고 온몸 구석구석, 정말로 내 신체에 이런 부위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평소에는 신경 써본 적도 없는 마디마디까지 근육통이 있었는데도 나는 어젯밤 설레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밭은 노동의 고통만큼 어떤 감동으로 되돌려주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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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은 후에는 식당 일을 도왔다. 단체 예약이 있었는데 예약 손님 외에도 많은 손님들이 오갔다. 스티니는 정신없이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나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들을 익숙하게 기계에 돌리고 닦아 정리했다. 베티는 주방을 산만하게 누볐는데, 어제부터 간단한 요리를 일임하고 있었다. 나 또한 스티니를 도와 험멜러며 아바바 케이크, 비트 절임을 만들었었지만 손님에게 내가는 음식을 전적으로 내가 담당해서 만들어본 적은 없었다. 베티는 오자마자 스티니의 보조가 되어 음식을 몇 가지 만들더니 오늘은 스티니가 받아온 주문서를 보며 서툰 손놀림으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이 조금 불편했다. 베티가 어떤 중요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단순한 질투심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얼이 빠진 얼굴로 주방을 바쁘게 오가는 것을 보며 그가 짊어지고 있는 책임이 무게를 내가 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베티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고 해서 그게 나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모든 면면을 생각해봐도 우린 공평했다. 다만 같은 상황 안에서 우리가 모든 걸 공평하게 나눠 갖고 있다 하더라도 끝내 내가 누릴 수 없는 것이 단 하나 있었다. 그건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에 대한 신뢰였다. 혹은 언어의 권력 분배랄까.


같은 말을 쓴다는 것, 내 말을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고 그와 같은 어순과 문법으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삶의 모습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베티가 온 뒤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이방인이고, 똑같은 모양의 방을 하나씩 차지한 채 똑같은 일을 하러 온 동등한 위치이지만 겨우 이틀을 지켜본 그와 나의 행동방식은 전혀 달랐다. 그는 독일인이지만 영어를 할 줄 알고, 무엇보다 덴마크어를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조금 할 줄 알았다. 물론 스티니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건 아니고 자주 묻고 또 배우지만 그래도 덴마크식 발음을 하고 덴마크 말의 어순대로 대답할 줄 안다. 바로 그 사실, 유창하게 말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만으로 베티는 스티니와 같은 위치에 서 있다. 적어도 스티니는 내 앞에서는 서슴없이 덴마크 말로 하던 민감한 이야기들을 베티 앞에서는 할 수 없을 테니까. 나이와 체구와는 무관하게(사실 무관하지 않다) 그 사실 때문에 나는 베티보다 작아진다. 스티니는 덴마크 말이 아닌 영어로 내게 천천히, 그리고 자주 반복해서 설명하고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갓 말을 뗀 아이에게 하듯이. 그가 나를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을 구성하는 언어로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없고 그건 나의 생각이 상대방에게 정확히 가닿을 수 있다는 믿음을 등진 채로 대화를 구성한다. 그리고 그 흔들리는 대화의 토양 위에서 자랄 수 있는 것들은 아주 사소하고 단순한 이야기들뿐이다. 어제 뭐했니, 오늘은 뭐 할거니…….


그런 현장을 마주하는 와중에 새로운 우퍼가 도착했다. 한국인 우퍼 히라. 하지만 그는 일상적인 소통이 원활하게 가능한 수준의 영어 실력을 갖고 있었다. 붐비는 카페에 막 도착한 그를 보며, 그가 스티니와 베티와 아무렇지 않게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보며 나는 순식간에 우리들의 서열을 세우고 있었다. 언어의 위계 속에서 나는 가장 마지막에 서 있었다.


불편한 저녁, 우리는 모두 함께 길을 나섰다. 날이 맑아 선셋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실은 새로 온 이를 맞이하는 인사처럼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아직은 우리들의 관계가 어떤 모양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동행하는 이 길이 어떻게 이어질지 걱정스런 마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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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얀의 안내를 따라 ballebjerg에 도착했다. 베티와 히라는 놀란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봤다. 행복해하는 그들을 보자 이 풍경이 내 것도 아닌데 마치 내가 준비한 선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나도 덩달아 행복해졌다. 자연 앞에서 언어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소통은 같은 언어를 통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고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는 걸 그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는 나를 느끼며 깨달았다. 우리는 추워서 덜덜 떨면서도 함께 해가 넘어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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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우리 사이에는 편안한 침묵이 감돌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발걸음을 맞추고 말없이 걸었다. 그때 베티가 “무슨 생각해?” 라고 모두를 향해 물었고 쇠얀이 대답했다. “침묵을 즐기고 있어.” 그의 말에 모두 웃으며 “나도 그래.”하고 너도나도 대답했다. 집에 돌아온 우리는 벽난로에 불을 때고 불가에 모여 앉아 오래토록 이야기를 나눴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대화를 모두 알아들을 수 있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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