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31 삼쇠섬 22일차(덴마크26일차)
실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는 오해 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제와 마찬가지로 정신없는 하루가 시작됐다. 어제 너무 힘들었던 때문인지 오늘은 애나미어도 오지 않아서 스티니와 우퍼 셋이서 정말 혼이 쏙 빠지도록 손님을 맞았다. 스티니는 주방을 들여다볼 새도 없이 카운터에서 손님을 받았고 베티와 히라가 쉴새 없이 음식을 만들었다. 접시가 모자라 음식이 밀릴 정도였다. 설거지와 홀 정리는 오로지 나 혼자의 몫이 됐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주방에서 쓰고 내놓은 설거지를 하면서 동시에 쉬지 않고 밀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테이블이 빌 때마다 지체 없이 가서 정리해야 했다. 새로 오는 손님들이 테이블을 치우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먹고 쌓인 접시를 옆으로 치워두고 그냥 앉을 정도였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힘들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다들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결국 마찰이 생기고야 말았다.
모두 어딘가 조금씩 나사가 풀려가고 있었지만 특히 베티가 더 그랬다. 사실 베티는 덴마크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우리보다 언어 실력이 조금 더 낫다는 이유로 보조 주방장처럼 음식을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이곳에 온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덴마크어로 적힌 주문서를 읽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 음식들을 만들기 위한 재료들이 주방 어디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히려 그보다 한가하던 때에 스티니에게서 이곳저곳을 보며 배운 내가 주방 사정에는 더 밝았다. 덕분에 베티는 밀려드는 주문서를 하나씩 보며 동동거리면서 그때 그때 필요한 재료들이 어디있는지 내게 묻곤 했다. 스티니는 질문을 받을 짬도 없어 보였다.
그러다 어린이용 음식에 사이드로 나가는 오이가 떨어졌다. 대부분 필요한 재료들은 아침마다 손질해서 음식을 만드는 요리대 밑 냉장고에 넣어두는데 그게 다 떨어진 거였다. 새 오이가 필요했고 베티는 마침 주방에 씻은 그릇을 가지고 들어온 내게 오이에 대해서 물었다. 나는 익히 알던 곳들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베티는 다급한 목소리로 자기 대신 스티니에게 가서 물어봐주겠냐고 했고,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카운터로 얼른 나가 스티니에게 오이에 관해 묻자 스티니는 자기가 곧 주방으로 가겠다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정신없는 베티를 향해 말해주려는데 스티니가 곧 들어왔다. 다시 한번 묻는 스티니에게 썰어 둔 오이를 들어 보이자 스티니가 구석에 있는 큰 냉장고에서 오이를 찾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스티니가 오이를 찾아 꺼내주겠거니 하고 얼른 홀로 돌아가 쌓여 있는 그릇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설거지를 한 번 돌리고 그릇들을 챙겨 주방으로 들어서자 베티가 매서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스티니에게 가서 오이가 어딨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잖아. 말을 못 알아들었으면 제발 다시 질문 해. Please!”
베티는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그렇게 소리쳤다. 히라가 뒤에서 "오이 여기 있어!" 라고 말했지만 베티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영문도 모른 채 나는 그 앞에 얼어붙었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나는 뭐라고 더 말도 못하고 그래, 하고 주방을 나갔다. 기계처럼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면서 온몸이 도통 식질 않았다. 가슴 중앙을 정통으로 뭐가 뚫고 지나간 것 같았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뭔가 오해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결코 그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이 아닌데. 분명히 그의 요청을 스티니에게 전달했고 스티니가 직접 주방에서 재료를 찾는 걸 보았고 내 기준에선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베티는 내게 도움을 요청했으니 내가 직접 그걸 해결해주길 바랐던 것 같았다. 스티니에게서 내가 오이를 받아와 자기에게 주거나 아니면 스티니가 찾아줄 거라고 말해주길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요청을 듣고 나간 내가 소식이 없자 내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니, 사실 그건 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이해해보려고 애써 떠올린 것들이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나를 쳐다보며 소리치는 그는 그저 나를 향해 분풀이를 하고 있는 거였다. 바쁘고 힘겨운 이 상황에 격해진 감정을 그저 내게 쏟아내고 있는 거였다. 그의 눈동자에서 나는 그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에 그는 내게 마음을 열고 소통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베티는 그게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특히 낯선 언어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던 내게,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것에 예민한 내게 그의 찰나의 감정 표현은 내 신경을 모두 위축시켰다. 다양한 서비스직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가 처음 배운 것은 자신의 날 것의 감정을 숨겨야 한다는 규칙이었다. 덕분에 종종 서로 충분히 마음을 교류하기도 전에 자기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나는 염증을 느껴왔다. 도대체 어째서 내게 저렇게 말할 수 있는가. 어째서 저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 사이에 놓인 오해를 나는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 뒤 베티는 조금쯤 정신을 되찾은 얼굴로 주방에서 나와 내게 다정한 목소리로 “괜찮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하고 말했다. 아마 아까 전 일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의 요청대로 음식을 테이블로 내갔다. 점점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식당은 한산해졌다. 식당 안과 밖에는 접시와 잔해들이 전쟁 같았던 모든 것을 대변하듯 어지러이 쌓여있었다. 멍한 얼굴로 그릇들을 설거지 기계 안에 넣고 있는데 손님이 빈 그릇들을 차곡차곡 챙겨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나는 그를 향해 웃으며 땡큐, 하고 말했다. 그는 곧장 떠나지 않고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많이 바빴지?”
“응. so busy.”
“그래. 너 오늘 정말 바빠 보였어.”
남자는 안쓰러운 듯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떠나갔다. 목 뒤쪽에서 찌릿하고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그 말 한마디가 여태껏 들은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더 위로가 됐다. 그래, 너 참 바빠 보였어. 많이 바빴지. 그거면 되는 거였는데.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말이 아니라 나를 향한 눈빛에서, 내게 말하는 목소리에서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의 그 한 마디가 없었더라면 나는 다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밤새 앓았다. 몸도 피곤하고 정신도 온전치 않았다. 내 표정에서 뭔가를 읽어낸 쇠얀은 이유를 추궁했고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화난 얼굴로 말했다. 이 일에 관해서 베티와 꼭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고. 하지만 내겐 그럴 힘이 없었다. 무엇보다 원활하지 않은 언어로, 내가 가진 겨우 몇 안 되는 단어로 어떻게 내 생각을 오해 없이 전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진 단어들은 걸음마 수준이어서 좋다, 싫다, 나쁘다, 화났다 같은 너무 단정적인 것들 뿐인데. 내가 느낀 감정을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해소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분명 베티와 꼭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말을 고르고 고를수록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갔다. 같은 언어를 써도 얼마든지 사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오해하니까. 실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는 오해 속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우리 사이엔 공통의 언어보다도 서로를 향한 마음의 고리부터 찾는 게 먼저였다. 그저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통할 수 있다면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땐 그저 “우리 오늘 정말 바빴어.” 그 한마디로도 충분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