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자국에서 두 발자국의 희망을
나의 우울증에 관하여
2024년은 참으로 사건·사고가 많았던 해였던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혼란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연말에 큰 사건·사고가 발생하면서 우리 마음은 뒤숭숭하고 신년에 대한 기대감보다 24년을 이렇게 마무리하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큰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놓아줘야 할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제게 2024년 한 해의 가장 큰 화두는 바로 '우울증'이었습니다. 작년은 제게 쉽지 않았던 해였습니다. 특히 회사에서 업무적으로 과중하고 부담되는 상황이 많았고, 리더나 후배들과는 여러 관계적이 이슈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불면증이 찾아왔습니다. 흔한 직장인들의 일요병이 찾아와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한두 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도 불면증이 있었을 때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은 적이 있었기에 조만간 가서 불면증을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출근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바로 연차를 내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저는 불면증 치료를 위해 신경안정제나 약한 수면제 정도를 처방받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넘는 검사 후 받은 결과는 제 생각과는 전혀 다른 진단이었습니다. 진단명은 '우울증'이었습니다. 그 단어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고, 곱씹으니 '내가? 도대체 왜? 스트레스 좀 받고 힘들다고 우울증이라고?' 생각하며 부정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최근 화가 많아지고 짜증이 잦아지긴 했어도 우울증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습니다. 굉장히 당황스러웠고 스스로 '내가 멘털이 이렇게 약했나?' 하며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가면성 우울증'이라고 했습니다. '가면성 우울증(Masked depression)'이란 우울증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우울감이나 무력감 같은 내면적 변화가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는 물론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가면'을 쓴 상태의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가면성 우울증은 내면적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신체화 현상으로 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니 저에게 불면증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집 비밀번호를 까먹기도 했었고, 평소와 다르게 과도한 음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회사에서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아졌고, 작은 문제 상황에서 지나치게 흥분하고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었죠.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평소와 다른 무기력에 노출되었을 때 스스로를 자책하고 몰아붙였습니다. '이거 밖에 안 되냐. 겨우 이 정도에 힘드냐'라고 되뇌었습니다. 사실 제 몸과 마음은 이미 저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들으려 하지 않았죠. 애써 무시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좀 더 강인해져야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처방받은 약을 들고 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어려웠습니다. 지금 제 삶은 크게 문제 될 게 없었습니다. 아니, 과거의 어떤 상황을 놓고 보아 지금보다 객관적으로 좋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물질적으로도 큰 부족함 없이 살고 있습니다. 직장도 인정받으며 다니고 있구요. 과거에 돈 한 푼 없어 끼니를 걱정하던 때나 취업이 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던 시간, 그리고 남들 취직할 때 뒤늦은 수험생활로 자존감을 바닥 치던 시절에도 우울증은 아니었는데 도대체 왜 지금 내게 우울증이 찾아왔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울증은 객관적 상황이 아니라 주관적 인식에 의해 찾아온다는 것을 말이죠. 객관적인 현실의 상황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좀 더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제 자신을 움직인 원동력은 "불만"과 "불안"이었습니다. 항상 조금 더 나은 상태를 꿈꾸기에 부족하거나 문제 상황에 대한 '불만'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고, 그것을 해소하지 않으면 '불안'해왔습니다. '불만'과 '불안'이란 동력이 목표와 희망이 있을 때는 성취감과 안도로 변환되며 스스로를 지탱해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목표와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의 '불만'과 '불안'은 제 자신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4년 한 해 동안 회사 생활에서 참 많은 좌절을 느꼈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상황들과 개선될 가능성이 없는 문제 상황만 축적된다고 생각됐습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조직에서 내가 필요한 상황일까?', '과연 내가 한 일이 의미 있고 주변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을까?'라는 질문들을 많이 되뇌었습니다. 좌절감의 굴레는 '불만'과 '불안'을 동력 삼아 저를 우울증으로 이끌어 간 것 같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P.108
휴식 없는 활동은 언젠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피로해진 몸과 마음은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에 직면하게 되면 곧장 깊은 우울증으로 곤두박질친다. 서윤 씨처럼 활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보다 좌절을 더 못 견디는데, 그것은 자신을 과대 포장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강하고 완벽하게 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수에 대해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있다. 만약 실수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못났다고 생각하게 될 테고, 실망한 그들이 모두 떠나가 버리면 자신은 홀로 남게 될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두려움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긴장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항상 열정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들, 그들은 알고 보면 마음껏 울지도 못하고, 약하고 상처받은 자신을 부인하고 감추기에 급급해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우울증 진단은 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항상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안다고 자부해왔습니다. 그렇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나의 욕구와 욕망에 대해서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활력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내적으로는 불만과 불안을 원동력 삼아 움직였고, 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해 보이고 빈틈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실상은 좌절된 목표와 보이지 않는 희망 앞에 길 잃고 헤매며, 나약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상담 치료 중에 의사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세 가지 유념사항을 말씀하시더군요.
첫째, 모든 것을 통제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안 되는 게 더 많을 것이다.
둘째, 우울증이라고 하여 모든 감정을 우울증이란 틀 안에서 해석하려 하지 마라.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는 동일한 감정이거나 스트레스일 수 있다.
셋째, 회복에 전념하지 마라. 모든 것을 노력으로 해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장기적으로 바라봐라.
최초에 우울증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고, 주변 상황에 대한 통제 욕구가 강하다 보니 의사 선생님께서 강하게 저에게 치료 과정에서의 유념사항을 말씀 주셨습니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으니 우울증 치료를 목표 삼아 달리려고 하는 저를 보면서 뜨끔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의 속내를 들킨 것 같았죠.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우울증을 극복의 대상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의 감정 중 하나라고 인식하기로 했고, 평소처럼 행동하되 나의 몸이 반응하면 자책하기보다 잠시 멈출 때임을 자각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강인해 보이려고 노력하기보다 잠시 내려놓자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 우울증임을 인정하고 회사에서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것만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문제들은 잠시 눈을 감고, 해야 하는 것에만 집중하자.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되뇌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짐이 무색했습니다. 저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상관없이 또 무언가를 하고 있더군요. 이미 짜인 형식을 굳이 새롭게 짜면서 일거리를 만들고, 개선점을 찾기 위해 인터뷰를 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습니다. 저에게는 타성에 젖어 하나마나한 일을 그저 해야 되는 상황이 더 제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어른들을 위한 심리학」 P.175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정상의 기준이 "약간의 히스테리, 약간의 편집증, 약간의 강박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곧 누구도 이런 것들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내 안에 콤플레스나 갈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 되는 건 아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상의 기준을 무결한 상태가 아니라 일정한 수준으로 문제를 관리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불만'과 '불안'이란 스스로의 원동력을 부정하기보다 관리해야 될 것 같습니다. 여전히 제 주위에는 개선해야 할 것 투성이로 보입니다. 해야 될 것, 할 수 있는 것도 많지만 눈감아버리고 싶은 골칫거리도 넘칩니다. 그렇지만 하나 바뀐 것이 있다면 이제 그 모든 것이 바뀐 상태를 목표로 삼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상태를 목표로 삼는다면 문제에 압도 당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다시 제 자신에게 '불만'과 '불안'이 제 자신을 잠식하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변화한 것, 그리고 변화시킨 것에 대해서 뒤를 돌아보려 합니다. 무작정 변화시키고 개선하기보다 이미 변화된 상태를 보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한 사람, 주변에 작은 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 저는 그런 사람이고 싶습니다.
"한 발자국의 진보도 진보다. 왜 한 발자국 밖에 나아가지 못했냐고 되물을게
아니라 한 발자국에서 두 발자국의 희망을 보아야 한다."
아직까지 바뀌지 않은 미래만 보며 불만과 불안을 느끼기보다 조금이라도 변화된 나의 주변, 공동체, 그리고 지금껏 해온 나의 노력들을 보며 다음 희망을 봐야겠습니다. 그것이 저의 '불만'과 '불안'을 관리하는 방법이 될 것 같습니다.